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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종구 칼럼] ‘한반도 운전자’와 미국 교통경찰

등록 2018-08-15 18:35수정 2018-08-17 11:45

김종구

때로는 전문가의 권위 있는 설명보다도 드라마나 만화의 대사 하나가 더 정곡을 찌르기도 한다. “역시 트럼프는 부동산 전문가답군. 아파트를 한 채 사도 계약하면 계약금에 중도금까지 치르고 날짜 되면 잔금 치르고 명의 이전 하는 건데, 계약하고 온 날 등기부등본 받아 왔냐고 따지고 들면 안 되지.” 영화 전문잡지 <씨네21>에 인기리에 연재되는 ‘정훈이 만화’에서 ‘김똘만 회장’이 6·12 북-미 정상회담 다음날 신문을 펼쳐 들고 하는 말이다. 미국과 한국의 강경보수파들이 “미국이 정상회담에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비핵화’ 약속을 받아내지 못했다”고 비판한 데 대한 촌철살인의 멘트다.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끝난 뒤 두달여,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그 뒤 행보는 ‘부동산 전문가’답지 않다. 잔금(평화협정)까지는 아니더라도 계약금(대북제재 완화)이나 중도금(종전선언)이라도 치러가며 거래를 진행해야 옳은데 우선 소유권 이전부터 하자고 우긴다. 미군 유해송환, 미사일 엔진실험장 해체 등 나름 계약사항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여기는 북한으로서는 입이 뾰로통하게 나올 수밖에 없다. 양쪽의 거래가 삐걱대면서 ‘중개업자’인 남쪽 정부의 입장도 난감해졌다.

물론 70년 가까이 철천지원수로 지내온 북-미가 이 정도 상황에까지 온 것만 해도 기적이고 천지개벽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이달 말에 북한을 방문해 핵무기 리스트와 종전선언을 맞바꿀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아직 실망보다는 기대, 비관보다는 낙관적 전망이 훨씬 우세하다. 그런데도 요즘 들어 부쩍 미국의 일방통행식 태도가 눈에 밟힌다. 외교군사 문제에서 미국과 한국의 철저한 갑을 관계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남북의 평화가 아스라이 지평선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현주소가 더욱 선명해졌다.

11월로 예정된 미국 중간선거까지는 북-미 관계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그런대로 흘러갈 것이라고 예측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미국으로서도 협상의 동력을 이어가야 할 국내 정치적인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간선거라는 급한 불을 끄고 나면 여러 가지 상황 변화가 올 수 있다는 관측이 대두한다. 선거에서 공화당이 참패하면 트럼프 행정부가 궁지에 몰리면서 북한에 대해 강경 노선으로 선회할 가능성이 있고, 반대로 공화당이 선전할 경우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 등 트럼프 행정부 내 초강경파의 목소리가 더 커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래저래 미국의 국내 정치 상황이 한반도 미래의 불확실성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한반도의 운명이 미국 국내 정치의 종속물이 되는 것을 우리는 그냥 당연시하는 게 옳은가. 미국 중간선거는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을 갖는데, 중간평가 항목이 단지 북-미 관계만은 아니다. 국내 경제 성적표, 중국과의 무역전쟁 등 대외 정책의 성과, 트럼프 대통령을 둘러싼 각종 스캔들 등 모든 것이 망라될 것이다. ‘나비효과’ 개념을 끌어들여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트럼프 대통령의 포르노 배우 스캔들이 한반도에 사는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도 있는 상황인 셈이다. 그런 현실을 우리는 그냥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글을 쓰는 날은 마침 8·15 광복 73주년이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평화 정착, 남북 경제공동체의 꿈을 이야기하는 순간에도 태평양 건너편에서는 “남북 관계가 북-미 관계보다 너무 멀리 앞서 나가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경고음이 들려온다. 문 대통령이 ‘한반도의 운전석’에 앉아 있다고 해도 교통경찰이 신호해서 운행을 철저히 통제하면 그만이라는 이야기다.

진정한 광복은 익숙한 관념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동안 당연시해온 고정관념, 우리 안에 깊이 침윤된 체념과 숙명론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없는 광복절 기념은 허무하다. 한반도가 미증유의 대격변 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문재인 정부가 교통경찰의 과도한 통제를 뚫고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정부 관계자들의 비상한 각오가 있어야 하겠지만 이를 응원하는 국민의 의식 변화 역시 필수적이다. 미국의 행보에 대한 관측과 분석만 난무하고, 미국이 내린 결정이면 무엇이나 한-미 동맹의 중요성이니 냉엄한 국제현실이니 하며 받아들이는 한 진정한 광복도 독립도 멀기만 하다.

편집인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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