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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파원 칼럼] 내 몸에 새겨진 8월 / 조기원

등록 2018-08-23 18:14수정 2018-08-28 15:37

조기원

도쿄 특파원

2008년 국무총리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이하 강제동원위)는 <내 몸에 새겨진 8월―히로시마, 나가사키 강제동원 피해자의 원폭체험>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강제동원돼 원폭 피해를 입은 이들의 증언을 모은 귀중한 자료다. 강제동원위는 2014년 활동을 종료했고, 이 책의 존재도 잊혀가고 있다. 하지만 피해 당사자들의 몸과 마음에 난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조선소에 강제동원됐던 이관모(95)씨와 김성수(92)씨는 6월26일 피폭자 건강수첩 교부를 일본 정부에 요구하는 소송에서 증언하기 위해 나가사키를 찾았다. 일본 정부는 ‘피폭자 원호법’에 따라서 1945년 원폭 투하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 지역에 있던 사람들을 ‘피폭자’로 규정하고, 이들에게 ‘건강수첩’을 교부하고 의료비를 지급하고 있다.

같이 소송을 제기한 배한섭(92)씨는 건강이 좋지 않아 일본에 오지 못했고, 일본 시민단체인 ‘한국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회’의 회원인 가와이 아키코가 대신 증언했다. 이씨는 미쓰비시중공업이 자신에게 붙였던 번호인 ‘산만로쿠센큐햐쿠주니반’(3만6912번)을 일본어로 또렷이 발음했다. 김씨와 배씨의 강제동원 피해 증언은 <내 몸에 새겨진 8월>에 실려 있다.

이들이 건강수첩 발급을 신청한 것은 2014년부터였다. 일본 정부는 건강수첩 발급을 일본 국내에 거주하는 이들로 국한해 한반도로 돌아간 조선인 피폭자 의료지원을 외면했으나, 한국 피폭 피해자와 일본 시민단체의 긴 투쟁 끝에 2008년 피폭자 원호법이 개정돼 한국에서도 피폭자 수첩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씨는 자신이 수용됐던 숙소 이름이 ‘기바치료’라고 증언하고 숙소의 상세한 위치와 배치도를 그렸다. 피해자 본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정보들이었다.

그러나 건강수첩 발급 신청을 받은 나가사키시는 이씨 등에게 각하 결정을 통보했다. 이유는 원폭 투하 당시 이씨 등이 나가사키에 있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공문서를 통해서 증명을 하지 않으면 피폭자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씨 등은 2016년에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 나가사키시의 건강수첩 발급 각하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일본 시민단체는 유력한 공문서 증거가 될 수 있는 미지급 임금 공탁서를 찾아 나섰다. 일본 기업들은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의 미지급 임금을 전후 법무국에 공탁했는데 이 공탁명부를 찾으면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해 8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나가사키지방법무국이 조선인 노동자 것으로 추정되는 3400명의 공탁명부를 1970년에 보존기간 만료를 이유로 폐기했다고 실토했다. 일본 정부가 1958년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의 경우에는 보존기간이 지나도 명부를 폐기하지 말라는 통달을 내려보냈는데, 통달에도 어긋나는 조처였다. 일본은 자신들이 기록을 폐기해놓고 이제는 기록이 없으니 증거가 없다고 버티는 중이다.

최근 만난 ‘한국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회’의 가와이는 커다란 파일에 관련 자료를 들고 와서 이 사건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해줬다. 그는 “강제로 끌고 온 사람들이 피폭을 당했는데 피폭당했다는 증거를 대라며 버티는 일본 정부의 태도에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한국 법원행정처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재판 결론을 미루는 대가로 외교부로부터 해외파견 법관 자리를 얻어내려 한 정황이 최근 계속 드러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피해는 두 나라 모두에서 외면받고 있다. 잔인한 이야기들이다.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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