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전국장애인부모연대 회원 자신의 직간접 경험을 이론적 배경으로 삼는 심리학 애호가들이 주변에 있다. 주로 남을 규정하는 일을 취미로 삼지만 규정당한 자의 분통 터짐과 억울함과 질긴 뒤끝 속에 번번이 곤란을 겪으면서도 취미를 접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안다. 사람은 그게 다가 아님을. 그런 어설픈 심리 애호가들에게도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준 올리버 색스라는 신경생리학자가 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등의 책으로 유명하지만, 그가 처음 쓴 것은 <편두통>이라는 책이다. 그 책이 신간 예고에 떴을 때부터 기다리다가, 번역자가 게으른가 하는 터무니없는 의심도 하면서 오매불망 기다렸던 나는, 짐작했겠지만, 오랜 편두통 환자다. 사실 편두통은 우리 엄마 쪽 내력이 있었다. 여섯명의 이모들이 집안 행사로 모였을 때 한결같이 이마를 끈으로 질끈 묶고서 속치마 바람으로 앉아 고스톱을 치던 풍경이 눈에 선하다. 옆에서 구경하던 나는 진통제 심부름을 하며 개평을 두둑하게 받곤 했다. 전적으로 내력 탓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어쨌든 일찌감치 편두통에 시달리던 나는 전국편두통환자연대, 세계편두통환자연합 같은 걸 만들겠다면서 뻥을 친 적도 있다. 아무튼 독자로서 열광하던 작가의 글을 환자로서 열광하면서 읽게 된 인연에 감사하며 책을 읽었다. 마치 그 책만 읽으면 나의 편두통에 관해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소상히 알게 되고, 부적 같은 처방전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의사의 궁극적인 관심은 병이 아니라 고통받는 환자 그 자체여야 한다’는 그의 말과 함께, 세상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편두통을 앓아온 족속이 늘 있었음을 보여주는 그 방대한 데이터를 보면서 적잖이 위로를 받았다. 지난 주말, 비구름이 내려앉아 대기 중에 불빛이 만연해진 밤거리를 걸어가며 장필순의 노래를 들었다. 그의 갈대소리인 듯 바람인 듯 하는 노래에도 가시지 않는 두통에 억울해하며, 어쨌거나 귀호사 한 것을 자랑하려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대화방엘 들어가보았다. 아이가 며칠째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울면서 보채고 있다는 후배의 하소연이 올라와 있었다. 발달장애가 있는 아이들 중에는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을 때가 있는데, 약이 바뀔 때 힘들어하는 경우가 꽤 있다. 그 아이도 그랬다. 며칠째 밤을 새우며 그 수발을 들고 있다 하니, 몰골은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그런데 그 끝에 그도 격심한 두통이 왔던 모양이다. 그는 ‘아마 우리 ○○이 머리가 이렇게 아픈가 봐요’라고 썼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한 그가 웃으며 내 편두통도 이러하냐고 물었다. 천성이 고운 그는 자기의 두통보다 아이의 두통, 나의 두통을 걱정하고 있는 게다. 아, 이렇게 아픈 거군요. 이렇게 아파서 어떻게 해요, 이러면서. 우리들의 통증엔 사연이 많아서, 어떤 통증은 호소이고 비명이다. 그 통증이 이해받지 못하고 나만의 것이 될 때, 통증은 미지의 것이 되어 더 아프다. 나는 나의 편두통을 그가 이해하게 되었음을 알고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나에게도, 그에게도 우리가 통증을 공유한다는 사실이 진통제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서로를 어루만질 뿐이다. 누군가 사랑하는 이 때문에 평생 아프다가, 아픔을 멈추지 못한 채로 죽게 될까봐 두려운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이 아픔을 함께 어루만지는 자, 동지라는 이름을 갖는다. 그러고 보니 올리버 색스가 죽은 날이 엊그제 8월30일이다. 그에게도 미소를 보낸다, 내 편두통이 여전함을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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