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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폭풍우 치는 날의 밀가루 8㎏ / 이명석

등록 2018-09-07 17:00수정 2018-09-08 16:24

이명석
문화비평가

어느 귀인이 갓 빻은 밀가루를 나눠주신다길래 손을 들었다. 원래는 스쿠터를 타고 살랑살랑 가져오려 했으나, 갑작스레 폭우가 쏟아져 버스를 탔다. 같이 가기로 한 친구를 중간에 만났는데 표정이 좋지 않았다. 여러모로 심상찮은 상황이었지만 돌이킬 수는 없었다.

나는 우산을 펴들고 폭풍우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친구가 뒤를 따랐다. “저기, 내 말 들려?” 친구의 높은 목소리가 빗줄기를 뚫고 들어왔다. “세상이 날 왜 이렇게 작정하고 괴롭히지?” 친구는 그날 겪은 부당한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왜 그 모든 일은 한꺼번에 일어나야만 했을까? 비구름은 왜 북쪽으로 빠져나가다 역주행하여 도심을 습격했을까? 나는 왜 소화도 잘 못 시키는 밀가루에 욕심을 냈을까? 왜 하필 이런 날 가져온다고 했을까? 친구의 편집자는 왜 갑자기 바뀌었고, 업무 파악도 못해 엉뚱한 요구를 하게 되었을까? 비는 우산을 때리고, 바람은 몸을 때리고, 친구의 푸념은 귀를 때렸다.

귀인의 집에 도착했다. 밀가루 8㎏은 못 들고 갈 정도의 양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야를 완전히 먹어치운 장대비 속에서, 젖으면 안 되는 노트북 배낭을 품에 안고, 한 손엔 우산을 든 채 다른 손으로 들고 가기란 쉽지 않았다. 친절한 귀인은 거기에 탐스러운 가지 한 무더기를 더해 주셨다. 버스 정류장을 향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잠시 숨을 고른 친구는 다시 자신의 삶에 찾아온 짜증거리들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럴 때 사용하는 처방법을 하나씩 꺼냈다. 첫째는 영육(靈肉)분리 요법. 지금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껍데기인 육체다. 그러니 영혼을 분리해 남의 일인 듯 지켜보자. 이게 자칫하면 다중인격 요법이 되는데, 새로운 인격이 원래의 인격을 나무라기 시작한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괜한 욕심을 부리더라고. 낑낑대고 밀가루를 들고 가면 뭐 해? 빗물이 들어가서 금세 썩어버릴걸.”

둘째는 천문학 요법. 이 우주에는 지구와 닮은 별만 수조개나 된다. 그러니 지금 내가 겪는 일은 너무나 하찮은 일이다. 이따위 것을 고통이라 부르기도 민망하다. 그런데 이 처방은 하늘의 별을 보아야 하는데, 우산을 쳐들다가 물범벅이 되어 버렸다.

셋째는 자연재해 요법. 인생은 말썽의 공장이다. 살다 보면 예측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비를 맞게 되어 있다. 누군가 나를 의도적으로 해코지한다면 맞서 싸워야 한다. 하지만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하늘에 소리 질러 봐야 무슨 소용인가? 비를 함빡 맞는다고 죽지 않는다. 미끄러져 넘어지면 밀가루를 쏟기밖에 더하겠어? 빗물에 흘려보내면 완전범죄가 되겠네.

이런 망상의 요법들을 거치면서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친구와 헤어지고 버스를 탔는데, 남대문 근처에 갇힌 채 꼼짝을 못했다. 그때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아까 이야기 들어줘서 고마워. 좀 풀렸네.” 그래, ‘친구에게 푸념’이라는 처방법도 좋지. “아니야. 반은 내가 듣고, 반은 비가 들었을걸.” “그럼 비한테도 고맙다고 해야겠네.” 그 한마디에 마음이 확 풀렸다. ‘말 한마디 요법’이라고 해야 할까? 친구와 조만간 만나 수제비를 해 먹자고 했다.

다음날은 약 올리듯 해가 반짝였다. 나는 베란다로 나가 밀가루를 작은 봉투에 나눴다. 8㎏의 밀가루는 열두 봉지가 되었다. 누구든 만나면 하나씩 나눠주기로 했다. 바닥에 떨어진 가루를 쓸어 담으니 손 하나에 들어왔다. 그러게, 이 정도는 떨어뜨려야 인생이지. 한 줌의 밀가루를 바람 속에 날려보냈다. 잘 가라. 어떤 날의 불운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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