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특파원 8일 도쿄 스미다구 야히로 조용한 주택가 앞에 있는 간토(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추도비 앞에서 한국인 2명이 절을 올렸다. 봉숭아꽃과 무궁화가 피어 있는 추도비 앞에서 소주를 따랐다. 이들은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희생자 유족인 권재익(62)씨와 조광환(58)씨로 6일 부산에서 페리를 타고 일본으로 왔다. 오랫동안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관련 영화를 제작해온 재일동포 감독 오충공씨 안내로 일본에 왔다. 이들이 절을 올린 추도비는 간토 지역 곳곳에 있는 조선인학살 추도비 중 한 곳이다. 추도비 앞 도로를 건너면 아라카와 제방이 나오는데, 1923년 간토대지진 때 이곳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했다. 일본 시민단체 ‘호센카’(봉선화)가 2009년에 추도비를 세우고 해마다 9월이면 추도제가 열린다. 올해는 예년의 갑절인 300명가량이 추도제에 참가했다. 호센카 이사 니시자키 마사오는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조선인학살 희생자에 대해서 추도문 송부를 거부한 지난해부터 참가자가 예년의 갑절로 늘었다”고 말했다. 권씨의 외할아버지인 남성규씨는 1923년 ‘후지오카 사건’ 때 학살당했다. 1923년 9월1일 간토 지역 대지진 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같은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조선인 6000명 이상이 일본인이 조직한 자경단과 경찰, 군인에게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조선인은 그나마 경찰서에 있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경찰서로 피신했다. 후지오카 경찰서에서도 조선인 노동자 17명이 피신했다가, 경찰서로 들이닥친 자경단에 살해당했다. 경북 영주 출신인 권씨의 외할아버지도 이때 숨졌다. 당시 30살이었다. 권씨는 어렸을 때부터 외할아버지가 간토대지진 때 숨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는 “지붕을 뚫을 힘이 없어서 돌아가셨다”고 말해왔다. 외할아버지가 숨진 구체적인 장소를 알게 된 것은 3년 전이었다.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이라는 책에 후지오카 사건 때 경찰서 지붕을 뚫고 탈출한 조선인이 있었다는 대목이 나왔다. 외할머니의 말이 생각났고, 제적등본을 발급받아 읽어봤다. 외할아버지는 1923년 9월에 군마현 후지오카 경찰서에서 사망했다고 적혀 있었다. 권씨의 외할아버지 이름은 군마현에 있는 사찰 조도지(성도사)에 있는 조선인 희생자 위령비에 적혀 있다. 9일 권씨는 절을 방문해 위령제에 참가하고 제사를 드렸다. 권씨는 “일본 땅을 밟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실 이전에는 일본에 오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다른 유족 조광환씨는 큰할아버지가 언제 어떻게 구체적으로 목숨을 잃었는지 알지 못한다. 경남 거창 출신인 큰할아버지는 동네 몇몇 사람과 함께 일본에 갔다. 같이 간 동네 사람 중 한 명이 간토대지진 때 살아 돌아왔다. 머리에는 칼로 베인 상처가 선명했다. 그는 조씨 가족에게 큰할아버지는 살해당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아픈 기억 때문인지 그는 간토대지진 때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이날 야히로에서 열린 행사에는 간토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중국인 노동자들의 유족도 참가했다. 중국인 유족과 한국인 유족은 여러번 포옹했다. 일본인 참가자들은 크게 박수를 쳤다. 조씨는 인사말에서 “이렇게 많은 분들이 모여주셔서 감사하다. 한국에서도 이렇게 많이 모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권씨는 “제적등본에는 외할아버지가 후지오카 경찰서에서 사망했다고만 적혀 있다. 살해당했다고 적혀 있지 않다”며 “진실을 밝히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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