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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1968년과 2018년 사이 / 이길보라

등록 2018-09-14 18:56수정 2018-09-15 01:35

이길보라
독립영화감독·작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불과 몇주 전이지만 한국에서 있었던 일이 아주 멀게만 느껴진다. 영화 후반작업을 위해 방문했던 한국에서 시간을 쪼개 ‘#미투시민행동’이 주최한 5차 성폭력 성차별 끝장집회에 나갔다. 동료의 부탁으로 얼떨결에 행사 기록용 카메라를 잡았다. 마스크와 모자 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온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 사이에서 촬영을 하려니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렇지만 꼭 기록해야 하는 현장이었다. 마음을 다잡고 카메라를 들었다.

“더 이상은 못 참는다, 못 살겠다, 박살 내자!”

“피해자 옆에 우리가 있다,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

나도 목청 높여 소리치고 싶어 촬영을 중단하고 피켓을 들었다. 구호는 단순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피해자다움 강요 말라, 가해자나 처벌하라!’ ‘가해자는 처벌받고 피해자는 일상으로!’ 도로를 행진하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내 옆에 서서 걷는 이들 대다수가 젊은 여성이었다. 분명 다른 집회 현장에서는 성별도, 나이도, 출신 성분도 모두 다른 이들이 모여 함께 목소리를 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함께 집회에 나간 동생은 ‘남성’이라는 이유로 돋보였다. 기자의 인터뷰 질문을 받기도 했다. 이상했다. 페미니즘은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성폭력과 성차별은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닌데 말이다.

자유 발언대의 마이크는 주로 10대와 20대의 여성들이 잡았다. 훌륭했다. 이렇게 ‘어린 여자’들이 세상을 바꿔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욕설이 들렸다. 지나가던 택시였다. 승객으로 보이는 남성이 창문을 열고 “야, 이 씨발년들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집회 내내 많은 차량이 경적을 울리고 창문을 열고 욕을 해댔다. 그렇게 많은 이가 모여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그 성차별에 반대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데도 그랬다. 정말이지, 대단한 혐오였다.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오자마자 시립미술관으로 향했다. ‘매직 센터 암스테르담-1967~1970년 예술과 반체제’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흑백 영상 두개가 나란히 재생됐다. 배에 두꺼운 매직으로 글씨를 쓴 여성들이 옷을 걷어 올리고 시위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의 자궁은 나의 것”이었다. 네덜란드 여성들은 거리에 있는 남성용 무료 화장실을 폐쇄하고 벽보를 붙이고 글씨를 썼다. 여성은 화장실에 갈 때마다 늘 돈을 내고 어렵게 찾아가야 하는데 남성에게만 이런 특권이 주어지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거리의 남성들에게 휘파람을 불며 옷을 만지는 등 여성이 실제로 길거리에서 어떤 경험을 하는지 유쾌하게 미러링을 했다.

그렇다. 1970년, 암스테르담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때 이 도시는 페미니스트, 히피, 동성애 인권활동가, 환경운동가, 무단점유자들의 안식처였다. 오노 요코와 존 레넌이 베트남 전쟁 반대의 뜻을 알리기 위해 했던, 그 유명한 ‘베드 인’ 평화 시위의 배경이 되었던 호텔도 바로 이곳에 있다. 그렇게 격동의 시기를 거친 후, 암스테르담은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가 되었다.

헌법재판관 후보자 청문회에서 “동성혼을 찬성하냐, 반대하냐”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 곳에서,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린치하고 폭력을 가했던 곳에서 암스테르담은 비행기로 불과 11시간 남짓 떨어져 있다. 1968년과 2018년, 그 사이를 우리가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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