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1845년 미국의 언론인 존 오설리번은 자신이 편집하던 잡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인류의 진보를 추구하는 국민이다. 누가 우리의 전진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 오설리번은 “미국이 북아메리카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것은 명백한 운명”이라고 단언했다. 당시 미국인들에게 오설리번의 ‘명백한 운명’은 신이 내린 계시로 여겨졌다. 미국 정치인들은 이 구호를 신념화해 멕시코 땅을 빼앗고 미국 영토를 태평양 연안으로까지 넓혔다. 미국의 팽창주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19세기 말엔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에 이르렀고, 20세기 양차 세계대전을 거쳐 전 세계로 확장됐다. 미국은 압도적인 군사적·경제적 힘을 앞세워 국제질서를 수호하는 세계경찰을 자임했다.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은 100여년 동안 미국을 이끈 ‘명백한 운명’에 대한 미국인의 신념이 근저에서 흔들리고 있음을 드러낸 사건이다. 트럼프 등장 이전까지 미국의 대외정책은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명백한 운명’의 수호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았다. 세계제국으로서 다소 너그럽게 지배하느냐 폭력적으로 지배하느냐의 차이는 있었을지 몰라도, 유일패권의 지위를 유지한다는 전략에서는 근본적 차이가 없었다. 존 매케인 장례식에 조지 부시와 버락 오바마가 나란히 나와 조사를 낭독한 것은 상징적이다. 장례식장에서 매케인의 딸 메건은 “미국은 다시 위대해질 필요가 없다. 원래 미국은 위대했다”고 트럼프를 성토했다. 메건의 트럼프 비판은 장례식장을 박수갈채로 채웠지만, 트럼프의 대선 슬로건이 미국의 허리에 해당하는 중하층 백인들의 마음을 흔든 건 사실이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트럼프의 구호는 미국이 위대하지 않다는 진단 위에서 나온 것이다. 미국이 세계 최강의 군사 대국이고 세계 최대의 경제 강국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미국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있고, 빠르게 성장하는 중국이 그 자리를 넘보고 있다. 트럼프의 구호에 담긴 속뜻은 돈은 많이 들고 실익은 없는 세계경찰 노릇은 그만두고 미국의 실질적 이익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대선 결과는 트럼프의 호소가 평범한 미국인들의 무의식을 건드렸음을 방증한다. 트럼프의 집권은 ‘명백한 운명’의 시대가 끝났다는 얘기와 다르지 않다. 워싱턴 기득권층의 반트럼프 정서의 뿌리는 여기에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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