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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평화, 힘이 세길 바라 / 김종옥

등록 2018-09-28 18:10수정 2018-09-28 22:32

김종옥
작가·전국장애인부모연대 회원

친구야, 신문에 실린 백두산 천지 사진이 내내 눈에 아른거린다. 서늘한 산비탈에 과연 웅혼한 기상이 서렸으니, 공기는 얼마나 맑을지, 물은 얼마나 쨍하니 차가울지 상상해본다. 그 앞에 선 남북한 정상의 모습은 엄숙한 그 순간에도 가족사진을 찍는 양 다정해 보였지만, 나는 시샘 섞인 부러움이 속절없이 튀어나와 가슴이 두근거렸어. 천성이 게으른 내게도 가끔씩은 산을 앓는 병이 있으니, 이제 백두산을 밟기 전까지는 내 병의 목록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이지.

텔레비전에서 북한 탐사 프로그램을 보고는 양념을 많이 넣지 않아 ‘쩡한’ 맛이 난다는 북한식 김치도 담가보리라 공언하니, 누군가가 호들갑을 떤다며 짐짓 흉을 보았어. 나는 되레 북한 여인들처럼 꽃무늬 한복에 꽃술을 들고 방방 뛰고 싶은 걸 참고 있는 중이라 대꾸했지. 기쁘고 좋은 일이니 이 정도 호들갑은 떨어줘야 마땅해.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거라니, 근 100년 이래 가장 잘한 일인 듯싶어서.

그런데 말이야, 또 한편으로 슬며시 뾰족한 생각이 올라오는 거야. 평화란 것이 어느새 이렇게 득달같이 달려와 안기다니, 참으로 희한하지 않은가 이 말이야. 전쟁 없는 세상을 꿈꾼 적이 한번도 없었다면, 서로 총칼 겨누며 미워하는 모습을 끔찍하다 여긴 적이 한번도 없었다면 모를까, 우리도 날마다 이 땅에 평화가 오기를, 달마다 서로를 오갈 수 있기를 빌어왔잖니? 그런데 미처 느끼지도 못하는 새에 평화가 기획되어 어느 날 부지불식간에 눈앞에 턱 놓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니, 희한한 일이지.

지난 몇 달 동안 벌어진 일을 보면, 마치 힘의 정점에 있는 몇 사람의 결단으로 세상이 극적으로 바뀐 것 같아. 단지 몇 사람의 결단으로 이렇게 단숨에 맞을 수 있는 평화였다면, 우린 그동안 얼마나 참혹한 거짓의 시간을 보낸 것일까. 그것이 허망하기도 하고 억울하고 기막히기도 해서 한참 동안 생각이 복잡했어. 몇천년 동안, 몇백년 동안 민초들은 평화도 전쟁도 그런 식으로 얼결에 맞닥뜨렸기에 그저 꼭대기의 처분만 바라보고 살아야 했겠구나. 그런 얄궂은 억울함이 들었다면, 너는 내게 너무 순진한 감상이라고 말할 테지.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미움을 쌓았는지. 의심과 증오로 서로 죽일 듯이 굴기도 했고, 서로를 적으로 간주해 총구를 단단히 들이대야 한다고도 했어. 그랬는데 단박에 서로의 손을 잡고 마주 웃게 되었으니 기실 작년까지의 미움은 거짓된 것, 조작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물론 수십년 동안의 현실적인 대립이 다 허상이었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 강고한 듯 보였던 싸움이 이렇게 한순간에 전혀 다른 국면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우리 안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평화를 준비해온 마음이 있었던 게지. 눈 밝은 이들이나 미리 알아챘겠지만 말이야. 그러니 나 모르는 사이에 선물이 당도했다고 너무 섭섭해하지는 않으려고 해.

우리의 평화는 힘이 셀 테지? 부디 그러길 바라. 거짓의 위협, 거짓의 전쟁은 248킬로미터 비무장지대에 60년 동안 100만개 이상의 지뢰를 묻었대. 그걸 다 없애는 데 100년(혹은 300년)이 넘게 걸린단다. 오랜 세월, 그 안에 쏟아넣었던 미움들, 그것들이 100만개의 지뢰로 땅속에서 옹긋옹긋 묻힌 채로 100년 동안 스스로의 전쟁을 치를 테지. 그래서 어쩔 거냐고? 100년 동안 지켜봐야지, 우리의 평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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