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뉴스팀장 얼마 전까지 외교안보 전문가들 사이에서 ‘핫’한 개념이었다가 지금은 ‘완전히’ 잊힌 용어를 하나 꼽으라면 단연 ‘신형 대국관계’일 것이다. 이 개념의 의미는 무척 모호하지만, 현 패권국인 미국과 이를 따라잡는 중국이 대립하지 말고 서로의 ‘핵심적 이익’을 존중하며 ‘윈윈 관계’를 구축하자는 뜻이라 이해하면 큰 무리가 없다. 중국이 미국에 이 개념을 처음 제시한 것은 2012년 2월 시진핑 당시 국가 부주석의 방미 때라 알려져 있다. 이후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된 시 주석은 2013년 6월 미-중 정상회담에 나섰다.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캘리포니아주 휴양지 서니랜즈로 시 주석을 초청해 이틀 동안 8시간이나 무릎을 맞대고 두 대국 간의 새 관계 구축을 시도했다. 시 주석은 이 자리에서 재차 신형 대국관계를 요구했고, 오바마 대통령은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로부터 5년4개월이 지났다. 현재 미-중 관계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흑 속을 지나고 있다. 미-중은 지난 7월 초 상대국의 수입품에 25%의 고율 관세를 매기는 무역전쟁을 시작했고, 중동과 동아시아를 잇는 주요 ‘원유 운송로’인 남중국해의 제공·제해권을 둘러싼 힘겨루기가 진행 중이다. 중국이 5월 남중국해 파라셀군도(중국명 시사군도)의 우디섬(융싱다오)에 전략폭격기 H-6K를 착륙시켜 괌의 앤더슨 공군기지를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하자, 미국은 중국이 자기 땅이라 주장하는 암초섬의 12해리(영해선) 안으로 함선을 들이미는 ‘항행의 자유’ 작전을 재개했다. 이 ‘뜨거운 바다’ 위로 핵 탑재가 가능한 전략폭격기 B-52도 여러 차례 출격시켰다. 두 나라가 우발적으로 충돌할 뻔한 일촉즉발의 상황도 있었다. 지난달 30일 중국 구축함이 미 해군 이지스함의 움직임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두 배가 45야드(41m)까지 접근했다. 두 나라는 ‘깻잎 한장’ 차이로 충돌을 피했다. 미국은 지난달 20일엔 중국이 러시아의 신형 지대공미사일 S-400을 구입했다는 이유로 중국 군부 인사를 ‘콕 집어’ 제재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같은 달 26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중국이 미 중간선거에 ‘개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밖에 양안 갈등, 위구르족 인권 문제, 대북 제재 해제를 둘러싼 이견 등 미-중의 대립 전선은 복잡하고 중층적이다. 두 대국 간 갈등이 첨예화하자 흥미로운 변화가 시작됐다. 2015년 4월 미-일 가이드라인 개정을 통해 ‘지역 동맹’에서 ‘글로벌 동맹’으로 위상과 역할이 확대된 일본 자위대가 조금씩 남중국해로 활동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해상자위대는 지난달 중순 전략자산인 잠수함 ‘구로시오’를 남중국해에 투입했고 ‘이즈모’와 ‘가가’ 등 F-35B를 탑재하면 언제든 항모로 변신할 수 있는 대형 함선들 역시 이 바다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청융화 전 주일 중국대사는 2016년 8월 중국이 군사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대응할 수밖에 없는 ‘레드 라인’으로 중국 배제를 목적으로 미-일이 남중국해에서 공동 군사행동을 하는 것을 꼽았는데, 한발만 더 내디디면 금을 넘게 된다. 미-중 간 신형 대국관계의 가능성은 소멸됐고, 우린 수십년간 이어질지 모를 ‘어둠의 터널’ 초입에 있다. 지난 사드 배치 갈등에서 보듯 한반도는 남중국해와 더불어 언제든 미-중의 전략적 이해가 충돌할 수 있는 거대한 ‘화약고’다. 문재인-김정은의 ‘위대한 모험’이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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