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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불행이 아니라 불평등입니다 / 김영희

등록 2018-10-25 16:21수정 2018-10-25 19:00

김영희
논설위원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나는 사탕을 먹고 싶지 않아요.”

비가 그치며 성큼 서늘해진 23일 오후, 청와대가 가까운 효자치안센터 앞 ‘서울시 발달장애인 차별증언 및 권리옹호 활동선포식’ 무대에 24살 청년 병욱씨가 손팻말을 들고 올랐다. 만나는 사람마다 과자나 사탕을 쥐여주고 아이 같은 감사인사를 시키는 게 싫다고 했다. 그의 말은 활동지원인이 전해주지 않으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 그렇다고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로 여겨지는 게 정당한가요, 그가 묻는 것 같았다.

최근 잇단 특수학교 폭행사건이 드러냈듯, 최소한의 보호도 이뤄지지 않는 ‘야만적’ 현실이 여전한 상황에서 장애인의 자립과 존엄은 ‘한가한 소리’라 할지 모른다. 하지만 통제와 교정의 명목 아래 나오는 폭력이 과연 몇몇 ‘나쁜’ 교사나 사회복무요원만의 문제일까. 차별은 그들을 ‘보통사람과 다른 존재’로 분리한 데서 비롯되는 건 아닐까. 이제 분노만이 아니라 다른 질문을 던져볼 때다.

장혜영 감독은 1년4개월 전, 18년간 시설에서 살던 발달장애인 동생 혜정씨를 데리고 나왔다. 동생과의 삶을 유튜브 채널로 전하고, 영화 <어른이 되면>과 책에 담고, 강연을 하고, 지난달 청와대에서 열린 발달장애인 평생케어 발표 땐 대통령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재주 많고 매력 많은 이 자매의 삶은 언뜻 보기에 행복하다. 혜정씨가 언니의 가장 아끼는 옷을 몰래 입는가 하면 서로 다투는 일도 적잖은 것 역시, 세상 흔한 자매 모습이다. 수많은 주변 지인이 혜정씨와 친구가 되고 활동지원인 교육까지 이수하며 혜영씨 없는 시간을 함께한다. 생계를 위해 일하는 틈틈이 혜영씨는 발달장애 이슈로 ‘가장 자주 마이크를 잡는’ 인물이 됐다. 하지만 이들의 삶이 쉬울 순 없다. “난 아프면 끝장이다. 가정 없는 장애인도 이리 살아야 하지 않나, 살 수 있지 않나 보여주기 위해 가진 모든 걸 쏟아붓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지난 23일 발달장애인들 스스로가 만든 단체 서울피플퍼스트 주최로 열린 청와대 앞 집회의 모습.
지난 23일 발달장애인들 스스로가 만든 단체 서울피플퍼스트 주최로 열린 청와대 앞 집회의 모습.

얼마 전 장 감독과 연 합동 북콘서트에서 김원영 변호사는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을 쓴 이유를 너무나 간극이 큰 두 세계 사이 ‘현기증’이라고 표현했다. 지체장애인이면서 로스쿨을 나와 이른바 ‘주류사회 자격증’을 갖춘 그는 “주류적인 언어로 내 친구들의 삶을 좀 가치 있게 서술하고 싶었다. 이 현기증을 해소하지 않으면 내 삶이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것 같았다”고 털어놨다.

장애인운동이라면 지하철에 쇠사슬을 묶은 당사자들이나 가족의 눈물과 무릎 호소 외엔 떠올리지 못하는 사회에서, 이들의 싸움은 분명 다른 결이다. 김 변호사는 “장애가 그리 단순한 문제도, 슬프고 비극적 문제도 아님을, 다양한 삶의 의미가 있음을 공유하고 싶다”고 말한다. 장 감독은 “대단한 이타심이 없어도 장애인과 함께 살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12월 일반개봉 예정)을 본 한 청소년이 ‘죄책감을 강요하지 않는 영화라 좋았다. 혜정씨와 친구가 될 수 있겠다’고 말해준 게 제일 기뻤다”고 했다.

쉽다는 게 아니다. 통합교육이 좋다지만 입시 중심과 생존경쟁만 넘치는 일반 학교에서 장애인은 더 큰 차별과 좌절을 겪을 수도 있다. 시설이 아닌 지역에서 살려면 개개인에게 맞는 충분한 활동지원 시간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렵다고 누군가에게 ‘인간의 권리’를 포기하라 할 수 있나. 장 감독과 김 변호사는 장애가 불행이 아니라 불평등의 문제임을, ‘아무것도 못하는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국가와 이웃이 손을 잡을 때 ‘다양한 삶이 가능한 존재’임을 비장애인 중심의 세상 한복판에서 말하는 중이다.

장 감독 자매의 집 작은 거실엔 이젤과 커다란 그림(사진)이 놓여 있다.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이 생긴 뒤, 요즘 혜정씨는 그림에 푹 빠져있다. 지난해말 춤과 노래 공연에 이어 올해는 전시회를 여는 게 목표다. 시설에만 있었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지역사회와 함께 살고 싶다.” 오롯이 자신들의 힘으로 만든 청와대 앞 집회, 발달장애인들의 목소리가 가을 하늘에 퍼졌다.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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