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연 경제부총리(왼쪽 둘째)와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가운데) 등 정부 경제팀이 8월29일 오후 서울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에서 만나 경제 관련 협의를 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제공
노무현 대통령은 ‘좋은 내용의 보고서를 만들어줘 고맙다’는 편지를 특별히 부처 실무자에게 보냈다. 하루에도 수많은 보고서가 대통령에게 올라간다. 노 대통령이 유독 이 보고서에 주목한 건, 경제 수치만으론 가늠할 수 없는 살아 있는 현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콘크리트공 장○○(47)씨는 고교 중퇴 뒤 30년을 건설현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부인, 초등 6년생인 딸과 3500만원짜리 방 2칸 전셋집에 산다. 일당 13만원의 고임을 받는 숙련공인데, 이번 3월엔 13일밖에 일을 하지 못해 수입이 169만원에 불과하다. 장씨는 외동딸을 남들처럼 학원에 보내지 못할 때 괴롭다고 자책했다. 장씨는 경기가 살아나고 있다는 언론 보도에 ‘건설현장은 분명히 작년보다 침체돼 있고 막노동 인생들의 체감경기는 한겨울과 같이 썰렁하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 4월 청와대에 올라간 ‘최근 서민경제 현장점검’이란 제목의 보고서 일부다. 100쪽 가까운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는 경제 데이터를 복잡하게 분석한 게 아니다. 경기 성남 인력시장부터 대구 서문시장, 광주의 화물운송조합, 인천 남동공단까지 전국의 중소기업과 자영업자, 일용직 노동자들이 피부로 느끼는 경제 현실을 신문 르포기사처럼 생생하게 담았다.
가령 제과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문○○(22)씨는 “매일 10시간씩 일하면서 추가수당 포함해 한달 평균 80만원을 받는다. 이 중 50만원을 어머니께 드리고 10만원은 적금 붓고 나머지 20만원을 내가 쓴다. 가끔 친구들 만나 간식 사먹고 영화 보는 게 유일한 소비다. …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달라”고 소망했다. 재래시장에서 1.3평짜리 한복가게를 하는 이○○(46)씨는 “1.3평 정도의 시세가 과거 1억원을 호가했지만 지금은 3천만~4천만원이며 그나마 권리금이 없을 정도로 장사가 안된다. 정부가 재래시장의 주차난, 카드 결제, 상품권 유통 등을 해결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 보고서는 당시 문재인 민정수석을 거쳐 노무현 대통령 책상에까지 올라갔다. 이걸 읽은 노 대통령은 문건 작성을 주도한 정부부처 실무자에게 ‘좋은 내용의 보고서를 만들어줘 고맙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루에도 수많은 보고서가 대통령에게 올라간다. 노 대통령이 유독 이 보고서에 주목한 건, 경제 수치만으론 가늠할 수 없는 살아 있는 현실의 솔직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 초부터 뜨겁게 달아오른 최저임금 논란에서 빠졌던 게 바로 이런 부분이 아닐까 싶다. 최저임금 인상 효과를 놓고 정부 경제팀과 비판론자들은 통계청 가계동향 수치 등을 인용하며 첨예하게 맞붙었다. 급기야는 표본과 조사방식의 적절성을 둘러싼 ‘통계 왜곡’ 논란까지 불거졌다. 이 과정에 영세기업과 자영업자들, 그리고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들이 실제로 겪는 다양한 현실의 어려움은 들어설 틈이 없었다. 최저임금 인상이란 방향이 옳은데도 효과를 거두지 못한 건, 이렇게 복잡다단한 현실을 간과하고 오직 수치와 논리만으로 정책을 추진한 데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요즘도 이런 보고서가 만들어져 청와대 실장이나 대통령 책상에까지 올라갈까. 알 수 없다. 다만, 며칠 전 국회에서 일자리 문제 등의 정책 협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적에 김동연 경제부총리가 “그게 우리 현실이고 실력이다”라고 토로한 걸 보면, 지금 관료사회 분위기론 국책연구기관 보고서 외에 직접 발로 뛰며 현장을 파고드는 보고서를 만들긴 쉽지 않을 거란 추측을 해본다. 최근 들어 문재인 대통령이 ‘작년과 달라진 게 뭡니까’라고 참모들을 질책하며 답답함을 토로한다는 신문 기사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두어달 전 김동연 경제부총리와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공개적으로 만나 서로 손을 꽉 잡는 모습을 연출한 게 모든 신문·방송의 주요 기사로 등장한 적이 있다. 경제팀이 정책으로 국민의 관심과 지지를 받기보다, 여야 정치인들처럼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화제가 되는 건 한참 방향이 어긋났다. 국민이 바라는 건, 경제부총리와 정책실장의 관계가 얼마나 좋아졌을까 하는 게 아니다. 팍팍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고, 불투명한 미래의 불안감을 정부가 걷어달라는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정부 정책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경제팀으로 그걸 되살리기엔 늦은 것처럼 보인다.
일자리는 늘지 않고, 주가는 떨어지고, 자동차를 비롯한 기간산업 부진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서민들이 보기에 올해는 분명 지난해보다 침체돼 있고 내년은 더 좋지 않을 것 같다. 곳곳에서 위기의 경고음이 들린다. 인사를 통해 분명하게 책임을 묻고 국민에게 방향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경제팀 개편은 빠를수록 좋다.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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