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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삼성바이오, 한국판 엔론 스캔들 / 박현

등록 2018-11-18 18:20수정 2018-11-19 13:56

박현
신문콘텐츠부문장

미국 에너지·통신 기업 엔론은 2001년 약 1조5천억원의 이익을 부풀리는 방식으로 회계장부를 조작한 게 덜미를 잡혔다. 이 분식회계 스캔들은 지금도 회계조작 하면 제일 먼저 언급될 정도로 미국 첨단기업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일대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이 사건의 기록을 보다 보면 탐욕에 눈이 먼 최고경영진이 회계법인의 묵인 아래 외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회계’라는 전문영역 뒤에서 얼마나 대담하게 장부를 조작했는지 아연실색해진다. 이들은 회계규정상 특별목적기구(SPE)의 지분율을 97% 이하로만 유지하면 연결재무제표 작성 대상에서 제외되는 허점을 이용했다. 이 관계사를 이용해 자금을 차입하면서도 차입금을 연결재무제표에서 누락하는 방식으로 이익을 부풀렸는데, 이 관계사가 무려 수백개에 이르렀다.

이 회사 경영진의 안하무인격 태도를 보여주는 에피소드 하나. 2001년 4월 기관투자가들과의 콘퍼런스콜이 열렸다. 한 증권분석가가 “엔론은 대차대조표가 실제 수익과 일치하지 않는 유일한 회사”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표이사인 제프리 스킬링이 나섰다. “음… 좋은 의견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멍청한 사람아.” 스킬링은 이런 공개적인 욕설을 통해 복잡한 회계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면박을 주면서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엔론 스캔들이 만천하에 드러난 결정적 계기는 내부제보였다. 부사장 셰런 왓킨스는 그해 8월 최고경영자 케네스 레이 회장에게 익명으로 회계처리의 문제점을 요약한 6장짜리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경영진이 진실을 덮으려 하자 왓킨스는 이 편지를 언론에 공개했다. 결국 엔론은 그해 10월 회계조작을 실토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사건을 엔론과 직접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회계조작의 규모(4조5천억원)와 대담성을 보면 엔론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또 대부분의 분식회계 사건들에서 최고경영층의 이해관계, 회계법인의 묵인이라는 특성들이 나타나는데 이번 사건도 예외가 아니다.

삼성바이오 쪽은 문제의 회계처리에 대해 “국제회계기준에 의거 엄격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외부 감사법인의 입장을 존중하고, 또 글로벌 기업으로서 회계의 투명성 제고 차원에서 이를 수용하였다”고 밝혔다. 회계법인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최근 공개된 삼성바이오 내부문건에 따르면, 이번 사건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시 제일모직 주가의 적정성 확보를 위한 차원임이 드러났다. 즉,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진행된 합병 건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내부문건엔 또 국내 4대 회계법인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묵인은 ‘삼성 제국’의 힘이 아니고선 설명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이번 건은 과연 어떻게 결말을 맺을까. 다시 엔론으로 돌아가 보자. 엔론과 회계법인 아서앤더슨은 1년 뒤인 2002년 모두 파산했다. 레이 엔론 회장은 24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복역 시작 전 심장마비로 숨졌고, 스킬링 대표는 14년 복역 뒤 올해 8월에야 풀려났다. 미국 자본주의가 정글 같지만 그래도 작동하는 것은 이런 준엄한 단죄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당시 사베인스-옥슬리법을 제정해 회계감독 강화의 전환점으로 삼았다.

불행하게도 한국에선 기아차(분식 규모 3조원), 에스케이(SK)글로벌(1조5천억원), 대우그룹(22조9천억원), 대우조선해양(5조원) 등 많은 분식회계 사건을 겪었음에도 아직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다. 여기엔 낮은 처벌 강도도 한몫한다. 기업 회계는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기초단위다. 이것이 거짓으로 만들어진다면 신뢰가 형성되지 않아 경제시스템 자체가 부실해진다. 이번 사건이 한국 자본주의가 재탄생하는 전환점이 될 수 있도록 일벌백계하고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할 것이다.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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