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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이택 칼럼] ‘국가부도’ ‘국정농단’ 저질러놓고도 여전히…

등록 2018-12-19 16:58수정 2018-12-19 19:29

IMF로 해고가 일상화되고 빈부격차도 심해졌다. 경제 파탄을 초래한 세력들이 20년 뒤 국정 파탄도 저질렀다. 그래 놓고 개혁에 따를 수밖에 없는 진통과 갈등을 과장·왜곡하고 있다. 국가부도와 국정농단의 피해는 국민 몫으로 남았지만 가해자들은 달라진 게 없다.
김이택
논설위원

첫 출근을 앞두고 새 양복을 차려입은 그가 수줍게 웃으며 부모님께 거수경례를 해보였다. 그 영상을 찍고 불과 3개월여 뒤 김용균씨는 스물넷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건 컵라면과 과자, 옷가지 몇개뿐. 두해 전 서울 구의역에서 세상을 뜬 김군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둘 다 ‘외주화한 위험’의 희생양, 비정규직이었다. 청춘들의 고단한 삶과 어이없는 죽음을 맥없이 지켜만 봐야 하는 우리는 참담하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 나오는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장면들도 비슷하다. 한강다리 난간 꼭대기에서 강물로 몸을 던지던 또 다른 김씨의 시선은 잠시 관객을 향한다. 흠칫 마주친 눈빛이 처연하다. 아이엠에프(IMF) 다음해 자살률이 42% 늘고 실업자 130만명인 시대가 됐다는 자막엔 가슴이 먹먹하다.

한국 경제가 약육강식의 시장만능주의가 판치는 정글에 내던져진 결정적 계기는 두말할 것 없이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사태다. ‘노동 유연화’ ‘구조조정’이란 이름으로 해고가 일상화되고 비정규직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빈부격차도 심해졌다.

어떤 이는 영화가 사실을 왜곡했다며 ‘모든 악의 근원을 아이엠에프로 규정한다’고 비난하지만 가공인물 등 약간의 영화적 각색을 제외하면 사태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1997년 12월3일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미셸 캉드쉬 아이엠에프 총재가 협약에 서명한 뒤에도 미국은 조건을 추가했다. 미국 방문에서 돌아온 김기환 경제협력특별대사는 12월22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를 찾았다. 미 정재계 인사들이 ‘정리해고제 수용, 외환관리법 전면 개정, 적대적 인수합병 허용’ 등을 추가 요구한다고 보고했다(<김대중 자서전>). 결국 외환보유고가 바닥나는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정부는 무리한 요구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엠에프 이듬해 경제성장률은 5.9%에서 -5.5%로 곤두박질쳤고, 그 다음해엔 비정규직(옛 임시일용직) 비율이 50% 선을 돌파해 최근까지 40% 선을 웃돌고 있다(2018년 8월 40.9%,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지난해 10월 외환위기 20년을 맞아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은 외환위기가 경제에 미친 부정적 영향으로 ‘양극화 심화’(31.8%)를 가장 많이 꼽았다.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으론 88.8%가 ‘비정규직 문제 증가’라고 답했다.

역대 정부, 특히 진보개혁 정부일수록 양극화 해소를 앞세웠으나 결과는 그리 신통치 못했다. 문재인 정부 역시 혁신성장·공정경제와 함께 소득주도성장을 3대 정책으로 내세웠으나 만만찮은 비판에 부딪혀 있다. 가난한 이들의 소득과 일자리가 도리어 줄었다는 통계는 소득주도성장론의 근거를 뒤흔들었다. 결국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공약을 보완하기로 한 것은 정부 신뢰도에도 상당한 흠집을 남길 것이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한 장면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한 장면
영화에 ‘무능’한 인물로 묘사된 당시의 청와대 경제수석이 최근 언론에 얼굴을 내밀었다. 기자가 현 정권이 ‘무능’한 이유를 묻자 “시장이 해결할 문제를 정부가 모두 해결하려 한다. 시장이나 기업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데서 멈춰야 한다”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현 정권이 ‘사회주의적 발상’을 한다고 덧붙였다. ‘국가부도’ 후유증에 시달리게 만든 장본인 얘기에 귀 기울일 국민은 많지 않겠지만, 정경유착·관치금융으로 환란을 불러온 정권의 경제사령탑이 ‘시장’ 운운하는 대목은 코미디다.

당시 집권당이던 지금 제1야당도 무책임하기는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불러들인 아이엠에프조차 ‘포용성장’을 강조하는 마당에 소득주도성장 때리기에만 올인할 일이 아니다. 이제는 국가부도가 우리 사회에 남긴 심각한 격차와 갈등의 그늘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경제를 파탄낸 세력들은 20년 뒤 국정 파탄을 저질렀다. 밀실·비선정치로 국민을 속이고 정보기관을 선거·정치에 끌어들인 사실이 들통나 아직도 청산작업이 진행 중이다.

국민의 힘으로 어렵게 개혁의 길로 접어들었으나 저항과 반동의 움직임은 만만찮다. 수구보수 야당·언론은 개혁에 따를 수밖에 없는 진통과 갈등을 끈질기게 과장하고 왜곡해 ‘개혁 피로증’ 바이러스를 곳곳에 퍼뜨려놓았다. 태극기 부대가 ‘정치보복’이라며 거리를 누비는 동안 ‘정권에 코드 맞추기’라며 검찰 수사를 조롱하더니 급기야 재판도 안 끝난 국정농단 책임자의 ‘석방’까지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국가부도와 국정농단의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남았지만 그 가해자들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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