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논설위원
# 그 새벽, 김용균씨의 시신이 채 수습되기 전 점검을 위해 세워져있던 1m 옆 컨베이어벨트는 80분을 더 돌았다. 그 아침, 회사는 김씨의 현장 ‘사수’에게 전화 걸어 ‘후배들 입단속 잘하라’고 당부했다.
# “수리하다 옥상에서 떨어져 연락하면 관리자들은 나머지 일은 어떻게 할래, 내일은 출근할 수 있냐부터 물어요.” 전원 직고용을 요구하며 단식하던 엘지유플러스 수리기사 두명은 한겨울 철탑에 올랐다.
김용균씨 추모문화제가 열린 지난 13일 광화문광장엔 발전소 동료, 수리기사, 기간제 교사의 발언과 “비정규직 없애자” 구호가 이어졌다. 발끝이 저린 추위보다 마음을 시리게 한 건 현실과의 아득한 간극이었다. 비정한 지시를 한 이들도 개인적으론 따뜻한 사람일지 모른다. 이런 사태의 원인과 근본대책 또한 우린 알고 있다. 그런데 제자리다. “참담했어요. 2인1조가 지켜지지 않은 거나, 우리가 시킨 게 아니라는 처음 회사의 해명이나 똑같아요.” 구의역 사고 당시 19살 김군과 은성피에스디 동료였던 ㄱ씨의 전화 너머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17일 서울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시민대책위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산재가 하청노동자에게만, 청년에게만 닥치는 건 아니다. 정부 통계에서 사고사망자 중 하청노동자는 2016년 기준 42.5%(50인 미만 사업장은 72%)다. 문제는 외주화가 급증하며 그 비중이 느는데 개선의 여지는 없다는 점이다. 비용 절감이 곧 경쟁력인 하청업체에서 경험 적은 젊은 노동자들의 작업중지권 따위는 비현실적 얘기다. 김씨와 동료들은 수천t 컨베이어벨트 아래 수십㎝ 공간에 수시로 들어가 낙탄을 제거하면서도 2인1조는커녕 전등 하나 더 달 수 없었다.
“정규직 안 해도 좋다. 죽지만 않게 해달라”는 절규가 역설적으로 상징하듯, 고용안정과 ‘안전’은 떨어져 있지 않다. 사회 경력도 군 경력도 인정받지 못한 ‘7급보’지만, 서울교통공사 정규직이 된 ㄱ씨의 얘기가 인상적이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가장 큰 변화를 묻자 “2인1조가 아니면 일이 아예 배정되지 않고 현장에서 역무원들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을 꼽았다. 대단한 변화처럼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순간의 ‘나 혼자’ 판단으로 목숨이 오가던 위험한 현장에서 물 흐르는 듯한 소통과 협력이 가능해진 것은 소중한 일이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그들은 200개 역의 안전문 고장 패턴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있다. 책임감과 소속감이 커진 덕일 게다. 장비 도입도 큰몫했지만, 지하철 안전문 고장은 2016년 6657건에서 올해는 11월말 3250건으로 줄었다. 거센 ‘고용비리’ 논란에 비해 이런 현장의 변화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국회가 원청 책임을 강화한 산업안전보건법 전면개정안의 내주 통과를 다짐하고 당정이 발전5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속도를 내기로 하는 등 청년의 죽음 앞에서 나태했던 정치권도 마침내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구의역 이후 2년여 세월에서 보듯, 이 분노와 슬픔의 순간이 지나면 또 언제 ‘기업들 손목만 비튼다’ 같은 주장이 고개 들지, 정규직 전환에 ‘청년 일자리 빼앗기’나 ‘무임승차’ 같은 프레임이 씌워질지 모를 일이다.
이번만큼은 ‘안전’을 위해 무엇이 우선인가를 잊지 않고 끈질기게 실질적 해법을 찾아야 한다. 공공기관 비정규직 해소는 정부 가이드라인을 놓고 해당기관과 당사자들의 혼란이 컸던 만큼, 발전5사 문제를 넘어 컨트롤타워를 만들고 실현 가능한 로드맵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내 파이는 못 준다’는 정규직의 욕망도 ‘전원 직고용이 아니면 기만’이라는 비정규직의 조급함도 조금은 내려놨으면 한다. 양대 노총이 정규직 중심주의를 벗는 건 그 전제다. 다만 업종여건 등으로 자회사 전환이 불가피하다면, 대신 모회사 수준의 고용안정성과 노동조건을 보장받는 현실적 감각도 배제하지 않았으면 한다.
무엇보다 갈등 많고 험난할 이 과정을 끝까지 추동할 힘은 “네 탓이 아니야” 포스트잇을 구의역에 붙였던 시민들이 그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일 게다. ㄱ씨는 말했다. “이젠 제발 ‘공부 못해 비정규직 돼 당하는 것’ 같은 표현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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