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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승욱의 증상과 정상] 소통의 그림자

등록 2019-01-13 17:12수정 2019-01-13 19:06

이승욱의
증상과 정상

천재 가다머에게 하이데거와의 조우는 행운이자 불행이었다. 하이데거를 비판 계승·발전시킨 철학계의 여러 거장이 있지만 하이데거가 가장 총애했던 제자이자 동료는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다. 나름 자신을 천재라고 자부했던 약관의 가다머는 당대 가장 유명했던 하이데거의 강의를 듣고 충격에 빠진다.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열등감과 까닭 모를 패배감도 느낀다. 반면 하이데거는 가다머의 천재성을 한눈에 알아보고 자신이 죽기 전까지 40년도 넘게 가다머를 제자로서 친구로서 지도하고 격려하며 교류한다. 그들이 숲속 오두막에서 함께 통나무를 자르는 사진을 보면 부자지간 같다. 하지만 가다머는 말년에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는 40년을 넘게 수도 없이 만났지만 나는 단 한번도 그와 대화한 적이 없다.”

가다머는 “하이데거를 만난 이후로 내가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쓸 때면 언제나 그가 내 뒤에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고 회고한다. 기나긴 학문의 고행길에서 가다머는 하이데거를 벗어나기 위해 전공분야를 바꾸는 등, 깊은 갈등과 괴로움을 경험했다. 해석학, 윤리학, 미학 등에 깊은 영향을 끼친 철학계의 이 두 거장은 결국 한번도 대화를 해본 적 없이 4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 버린 것이다. 대화란 무엇인가, 소통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심과 의문을 가지게 된다.

정신분석학의 시조였던 프로이트와 카를 융의 이야기다. 정신분석이 유대인 정신과 의사 커뮤니티의 한계를 넘어 유럽과 세계로 뻗어 나가기를 갈망했던 프로이트는 카를 융이라는 후배 학자를 만나, 그 꿈을 이룰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카를 융을 정신분석학회장으로 앉히고, ‘사랑하는 나의 아들에게’로 시작하는 애정 어린 서한을 수도 없이 보냈다. 카를 융 역시, ‘존경하는 나의 아버지에게’로 끝을 맺는 답신으로 화답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결국 꿈의 해석에 대한, 더 깊게는 인간의 정신체계에 대한 이견으로 둘은 결국 좋지 않게 결별한다. 심지어 최초의 미국 강연 여행을 코앞에 두고 벌인 둘의 설전으로 프로이트는 졸도해 버리기도 한다. (필자가 보기에) 융은 솔직하지 않았고, 프로이트는 두려웠다. 그들은 서로 자신의 의견이 손상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더 이상 서로를 손상시키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그들은 각자의 이견에 대해 솔직한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관계를 마무리해 버린다. 나중에 프로이트는 측근들에게 이렇게 탄식한다. “적들은 어떻게 해보겠는데, 친구들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적들과는 싸울 수 있다. 하지만 깊은 관계일수록 속 감정을 말하기 어렵다. 이런 난감함은 부부나 부모 자식 관계에서도 예외없이 발생한다. 원가족의 수치스러운 역사를 오히려 배우자에게 수십년째 함구하며 사는 부부들을 종종 본다. 가다머가 자신의 열등감을 그 깊이만큼 하이데거에게 털어놓지 못한 것이나, 정신분석학의 두 거장이 각자의 두려움을 ‘정신분석적’으로 서로에게 고백하지 못한 것이나, 우리 장삼이사들이 서로의 소중한 사람에게 자신의 치부를 공유하지 못하는 것이나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이런 대가들도 그럴진대 우리 같은 필부들이야 오죽하겠나, 하는 위로도 잠깐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못했다고 우리까지 못할 건 없지 않겠나. 대화의 어긋남을 가만히 살펴보면 소통이 막힌 뒤편에는 ‘경쟁’이라는 짙은 그림자가 쌓여 있는 것 같다. 상대를 이겨먹겠다는, 적어도 지지는 않겠다는 경쟁심은 늘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 같다.

닛부타의숲 정신분석클리닉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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