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선언을 줄곧 외면해온 <조선일보>가 갑자기 ‘개과천선’이라도 한 듯 양심선언의 열렬한 수호자로 나섰다. 하지만 최근의 폭로 사태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나, 시민사회단체와 청와대를 향한 “고무줄 잣대” 따위의 비판을 보면 양심선언 보도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도 찾아볼 수 없다.
편집인 1992년 3월, 14대 총선 직전 터진 이지문 중위(현 한국청렴운동본부 이사장)의 군 부재자투표 부정 실태 폭로는 한국 양심선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당시 조중동 등 대부분의 언론은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조선일보>였다.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는 그나마 사회면 4단, 6단으로 보도했으나 조선일보는 제2사회면(22면) 1단 기사로 찌부러트렸다. 당시는 지금 같은 인터넷도 없던 시대였으니 대부분의 조선일보 독자들은 그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그 이후로도 조선일보는 이 중위의 시민사회단체 활동 등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27년이 지나 갑자기 조선일보는 이지문 중위 인터뷰를 1면과 2면에 걸쳐 크게 실었다.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 신재민 전 사무관의 폭로에 힘을 실어주고 정부여당을 공격하기 위해 이 중위를 인터뷰한 것이다. 이 중위 인터뷰 기사를 내보낼 요량이라면 과거 자신들의 보도 태도를 반성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최소한의 양심이건만 눈을 씻고 봐도 그런 기색은 없다. 조선일보의 양심선언 외면은 이 중위만이 아니었다. 이문옥 감사관, 윤석양 이병, 김용철 변호사 폭로 등 훗날 국민권익위원회가 선정한 ‘한국 사회를 변화시킨 10대 공익제보’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보도한 적이 없다. 김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양심선언의 경우 사회면 3단, 그것도 “논란”이라는 꼬리표를 단 기사가 전부였다. 양심선언에 관한 한 놀라울 정도의 ‘일관성’을 유지해온 게 조선일보다. 그런데 갑자기 ‘개과천선’이라도 한 듯 양심선언의 열렬한 수호자를 자처하고 나섰으니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전 조선일보에 실린 ‘이렇게 선진국이 되어가나 보다’라는 제목의 한 외부 필자 칼럼은 더욱 쓴웃음을 자아낸다. 김태우 수사관, 신재민 전 사무관 등의 폭로를 우리 사회가 선진국이 돼가는 징표로 해석하면서 “그 불씨가 번져 선진 대한민국을 열면 좋겠다”는 글이다. 지난 30년간 이어진 숱한 양심선언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몸부림이었는데 그동안 조선일보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동안의 양심선언은 선진사회로 가는 불씨가 아니었고 요즘 나오는 폭로만 선진국이 되어가는 징표라는 이야기인가. 글쓴이가 한때 조선일보 기자를 지냈으니 조선일보의 ‘양심선언 보도 과거사’를 잘 알 터인데, 글을 쓴 사람이나 그런 글을 내보낸 조선일보의 배짱과 안면몰수가 참으로 놀랍다.
그래픽 정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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