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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 사회] 피해자의 ‘관등성명’ / 이라영

등록 2019-01-16 18:18수정 2019-01-17 14:22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인터넷으로 보면 성폭력을 폭로하는 여성이 많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제 얼굴을 드러내고 피해 경험을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성폭력이 아니라 성폭력을 폭로하는 여성들을 경멸하는 감정 앞에서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은 제 경험을 말하길 주저한다.

조재범 전 쇼트트랙 코치의 성폭력이 알려진 후 ‘체육계 성폭력’이라는 이름으로 이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무슨계 성폭력’이라 이름 붙이기가 조심스럽다. 성폭력뿐 아니라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 계통에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이 바닥이 워낙 좁아서.’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좁지 않은 바닥은 별로 없다. 비단 ‘체육계’만이 아니라 각각의 ‘바닥’이 다 좁고 나름의 폐쇄성을 유지한다. 물론 각각의 ‘바닥’마다 특수성이 분명히 있기에 그에 따른 폭력의 성격을 분석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그 각각의 세계가 매우 흡사하게 폭력을 반복 재생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연이어 나온 체육계 성폭력을 폭로한 두 사람의 위치는 폭력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한 사람은 세계 최정상으로 인정받은 ‘금메달리스트’이며, 한 사람은 한때 유망주였다가 ‘그 바닥을 떠난’ 사람이다. 곧 최고가 되어 권위를 가지고 말할 수 있을 때 성폭력을 폭로하거나, 이제 그 세계에 머물지 않아 잃을 경력이 없을 때 폭로했다. 여전히 ‘그 바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들은 입을 열 수 없다. 그렇게 폭력은 은폐된다. 이런 상황에서 성폭력 피해자의 얼굴과 이름을 보호하지 못하는 사회는 매우 위험해 보인다.

흔히 방송에서는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 하고 음성 변조와 가명을 사용해 제보자의 신원을 보호해준다. 얼굴과 목소리, 이름을 숨기면 정체를 알 수 없다. 배우 조덕제의 성추행 사건에서 ‘여배우 A씨’로 호명되던 피해자는 40개월의 법적 싸움을 끝내며 그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법적 판결을 받은 뒤에야 온전히 이름과 얼굴을 공개할 수 있었다.

“이름과 얼굴을 공개해야 사람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실명으로 폭로한 유도 선수는 방송에도 직접 등장해 자신의 얼굴을 모두 보이며 말했다. 자신의 이름으로 사건이 기억되기를 바란다고까지 하는 목소리에서 ‘얼마나 절박하면’이라는 마음이 읽혔다. 이미 작년에도 <제이티비시>(JTBC) 뉴스룸을 통해 여러 사람이 얼굴을 드러내며 성폭력을 고발했다. 이렇게까지 해야만 겨우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관등성명’을 요구하는 사회야말로 폭력적이다. 역사에서 쉽게 이름이 지워지는 여성들이 성폭력 사건에서는 피해자로서 그 이름이 적극적으로 불렸다. 가해 남성을 보호하고 피해 여성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한 호명이다. 여성이 가해자일 때도, 피해자일 때도 모두 여성의 이름으로 사건이 명명된다. 그렇게 가해 남성의 이름은 지워지고 가해 여성의 이름은 선명하게 남는다. 사회의 소수자들을 평소에는 장애인, 여자, 흑인 등으로 부르다가 낙인을 위해서는 이름을 부른다.

이 사회가 기억해야 할 이름은 피해자 개개인의 이름이 아니다. 폭력에 올바른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호명을 일종의 진단”으로 여기는 리베카 솔닛의 생각에 동의한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폭력에는 본래의 행위를 가리거나 희석하는 이름이 계속 붙는다. 골뱅이, 발바리, 몹쓸 짓, 원조교제 등. 이 사회가 성폭력을 진단하는 방식이다. 마찬가지로 성폭력을 폭로한 사람의 이름은 다른 방식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피해자’만이 아니라 공익제보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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