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승
논설위원
지난주 청와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기업인의 대화’에서 최태원 에스케이(SK)그룹 회장의 발언이 눈길을 끌었다. 다른 기업인들은 개인정보 규제 완화, 최저임금 차등 적용, 원전 건설 재개 등을 건의하거나 경제민주화법 입법에 대한 우려를 전했는데, 최 회장은 발언 시간 전부를 기업의 ‘사회적 가치’ 창출에 할애했다. “사회적 경제를 많이 일으키면 고용 창출에 상당한 효과가 있다” “1년 전에도 말씀드렸는데 사회적 기업 관련 법들이 진행이 안 되고 있다. 어떻게 하실 건지 알면 도움이 되겠다” “혁신은 실패를 먹고 자란다. 혁신성장의 기본 전제는 실패에 대한 용납이다” 등등.
재계와 정치권 일각에선 최 회장이 요즘 문재인 정부와 ‘코드 맞추기’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사회적 가치에 대한 최 회장의 관심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 회장은 2014년 쓴 <새로운 모색, 사회적 기업>에서, 부친인 고 최종현 회장의 ‘사회 공헌’ 철학을 어떻게 이어갈지 고민하던 중 2009년 연세대에서 열린 ‘사회적 기업 국제 포럼’에 참석해 사회적 기업에 관심을 갖게 됐고 사회적 가치의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사회 공헌이 기업이 생산한 ‘경제적 가치’(이윤)의 일부를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라면 사회적 가치 창출은 기업이 보유한 유·무형의 자산과 역량을 활용해 양극화, 고령화, 청년실업, 환경오염 같은 사회 문제 해결에 직접 나서는 것이다. 사회 공헌도 필요하지만, 기업이 단순히 사회적 책임을 이행한다는 수동적 관점을 넘어서 지속가능한 사회적 가치를 능동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게 최 회장의 지론이다.
최 회장의 사회적 가치 추구는 지난 10년 동안 확대·발전하는 진화 과정을 거쳐왔다. 처음엔 에스케이가 직접 사회적 기업을 운영했다. 그룹 차원에서 ‘행복 도시락’과 ‘행복한 학교’를 운영하고, 계열사별로는 ‘1 관계사, 1 사회적 기업’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하지만 사회적 기업을 마냥 늘려가는 것은 어렵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사회적 기업의 생태계를 조성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사회적 기업 발굴·지원과 사회적 기업가 양성에 나선 것이다.
지난해부터는 에스케이의 사업에 사회적 가치를 접목시키는 단계로 한걸음 더 나아갔다. 사회적 가치를 담아낼 수 있는 형태로 사업 모델을 혁신하는 것이다. 각 계열사들의 정관에 경제적 가치와 함께 사회적 가치 추구를 경영 목적으로 명시했고 올해부터는 계열사 최고경영자(CEO) 평가에 사회적 가치 창출을 50% 반영하기로 했다. 경제적 가치가 일부 줄어들더라도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총합이 커진다면 그걸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최 회장은 국외에서도 사회적 가치를 설파하고 다닌다. 지난 22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도 “사회적 가치 창출을 통한 지속가능한 경영”을 역설했다. 다보스 포럼만이 아니다. 베이징 포럼, 상하이 포럼, 보아오 포럼, 니케이 포럼, 하노이 포럼 등 주요 국제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을 알리면서 ‘사회적 가치 전도사’로 불린다. 세계 시장에서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를 찾는 일이기도 하다.
최 회장은 분식회계와 회사 자금 유용 혐의로 두차례 유죄 판결을 받았고 2년7개월 동안 수감 생활을 했다. 혼외자 문제, 부인과의 이혼 소송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 그럼에도 그가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는 사회적 가치 실험은 평가받을 만하다.
물론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높다. 최초의 시도여서 벤치마킹을 할 곳이 마땅치 않다. 그룹 안에서도 불확실성에 대한 걱정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런 불안감을 해소하려면 무엇보다 가시적 성과가 나와야 한다. 에스케이그룹 고위 관계자는 “최 회장이 ‘첫걸음을 내딛고 실행하는 게 중요하다’고 적극 독려하면서 임직원들도 맞는 방향이라는 것을 점차 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최 회장의 실험이 성공한다면 기업 경영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자산 190조원, 매출 160조원으로 재계 순위 3위인 거대 기업의 변화는 그 파급 효과가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 회장의 실험이 성공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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