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영화 <로마>의 주인공은 연애를 하다가 아기를 갖는다. 임신 사실을 극장에서 연인에게 말한다. 스크린을 등지고 여자의 몸을 탐닉하던 남자는 그 말을 듣고 자세를 고쳐 앉는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한다. 영화도 안 끝났는데 어딜 가냐고 여자가 묻자, 금방 올 거라며 뭐 사다 줄까? 묻기까지 하더니만 결국 오지 않는다. 남자는 종적을 감춘다. 이후 남자의 행동은 예상대로라서 슬프고, 예상치 못한 대목에선 참담하다. 주인공의 성정은 외유내강하다. 유명한 회화 속 ‘우유 따르는 여인’처럼 매일매일의 노동을 묵묵히, 만삭이 되도록 수행한다. 영화 끝무렵 딱 한번 감정의 수문을 연다. “아기를 낳고 싶지 않았다”며 목 놓아 운다. 나도 따라 울었다. 남자를 비난했고 여자를 연민했다. 여자의 엄살 없는 살아냄을 존경했다. 예나 지금이나 지구촌 어디서나 그래도 되는 남자가 계속 생겨나는 가부장제 시스템에 분개했다. 같은 영화를 본 친구는 주인공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 ‘원치 않았던 아기’의 존재에 감정을 이입했다. 친구는 말했다. “어쩌면 나도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 얼마 후 그 복잡한 사연과 심정을 글로 남겼다. 엄마의 냄새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엄마에 대한 정보는 두 가지뿐이다. 아빠와 아빠의 부모에게 가족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는 것. 자신이 생후 백일 무렵 홀연히 떠났다는 것. 친구는 자기도 엄마로 십년 넘게 살아낸 지금에야 엄마를 바로 본다며 이렇게 글을 맺었다. “그건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엄마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은 것뿐이다. … 엄마는 나에게 역할이 아닌 주체로 살라고 최초로 보여준 사람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20대 후반의 엄마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엄마, 너의 자유로움으로 가.” 드라마나 소설 같은 허구에서 엄마의 부재는 가능한 시나리오다. 자식을 버린 여자, 엄마가 되지 못한 엄마는 있었다. 나쁜 년이고 독한 년으로 불려나왔다. 현실에서는 보기 어렵다. 아니, 드러나지 않는다. 배타적인 직계가족주의 사회에서 엄마의 부재는 커다란 결핍이고 모성의 거부는 금기였으니까. 가족은 숨겼고 당사자는 숨었다. 몇 년 전부터 나는 그들을 본다.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소위 숭고한 모성의 기준에 미달한 존재를, 감히 자식을 저버린 엄마의 서사를, 그것을 진술하는 용감한 목소리를 듣는다. 조용한 감동이 인다. 이 사회에서 자리를 할당받지 못한 ‘모성 없는 (존재로 낙인찍힌) 여자들’은 약자의 자리에서 세상을 보는 법과 언어를 익힌 자식의 몸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영화 <로마>도 낮고 깊은 시선의 영화다. <그래비티>로 잘 알려진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인데 엄마, 누나, 보모 등 자신을 키운 여자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그중에서도 보모가 중심이다. 보모의 너그러운 품에서 먹고 자고 놀던 아이가 자라서 50여 년 후 영화를 내놓았다. 그것은 백인 가정에 고용된 원주민-보모?여성이라는 불리한 생애 조건에 놓인 한 사람을 역사와 서사 속에서 바라보는 데 걸린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나의 친구도 44년 만에 엄마를 재의미화했다. ‘엄마는 왜 나를 두고 갔을까’에서 ‘엄마는 왜 나를 두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로 질문이 나아가기까지 한 세월을 바쳤다. 친구가 그간 읽고 쓰고 보고 들은 모든 것은 엄마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이해는 그만큼 고도의 지적 작업이다. 한 편의 기품 있는 영화가 불러온 이야기를 전하며, 친구의 이야기를 이어받아 또 다른 삭제된 존재로서 여자의 서사가 태어나길 기대한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