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재
코인데스크코리아 편집장
많은 이슬람 국가에서 대다수 여성은 경제활동을 하지 못한다. 은행 계좌도 가질 수 없다. 경제적 자립 없이 여성의 권리 향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소셜미디어와 온라인 사이트를 이용하는 콘텐츠 제작자들에게 기여 정도에 따라 금전적 보상을 하는 미국의 예술단체이자 벤처기업 ‘필름아넥스’는 아프가니스탄 소녀들에게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사용법을 가르쳤다. 수천명의 아프가니스탄 소녀들이 콘텐츠 제작자가 됐지만, 은행 계좌가 없는 이들에게 금전적 보상을 할 방법이 없었다. 필름아넥스는 2014년 비트코인 지급 시스템을 도입해 문제를 해결했다. 아프가니스탄 소녀들은 은행에 가지 않고, 자신의 성별을 알리지 않고, 아버지와 가족의 허락을 받지 않고,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들이 쓴 책 <비트코인 현상, 블록체인 2.0>이란 책에서 접한 이 이야기 덕분에 블록체인의 ‘소셜 임팩트’에 눈을 떴다.
구호단체 활동가로 서아프리카 말리를 방문한 이송이씨의 사례도 비슷하다. 말리의 여성들은 외국으로 일하러 간 남편이 인편으로 보내오는 돈에 의존해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배달 사고는 다반사였고, 쓰레기로 지은 집에 목돈을 보관하는 것도 곤란한 일이었다. 열악한 형편에도 집집마다 구호품으로 받은 2G폰과 태양광 충전기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씨는 친구들과 함께 문자메시지로 비트코인을 주고받을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었다. ‘37코인스’라는 프로젝트였다.
안타깝게도 필름아넥스와 37코인스 두 실험 모두 결국 실패로 끝났다. 실패 원인이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고결한 이상이 사업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건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실험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블록체인과 암호화폐의 가능성에 주목하게 만든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얼마 전 블록체인 기업 대표들이 주로 가입된 어느 협회의 단체 채팅방에 올라온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300명 가까운 가입자가 있는 채팅방에 협회장이 ‘경제학과 인문학’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제법 긴 글은 여성의 몸매를 비유해가며 인플레이션을 설명하는 등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 비하로 가득했다. 부적절한 글이라는 지적에 이내 회장은 ‘경제학과 관련한 재미있는 비유라고 보고 친구한테 받은 글을 생각 없이 올렸다’며 사과했지만, 몇몇 사람들은 ‘웃자는데 싸우자고 덤빈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3년 전 게임 캐릭터 목소리를 녹음한 여성 성우가 ‘여자는 왕자가 필요 없다’(Girls do not need a prince)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트위터에 올린 일로 게임업계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 당시 넥슨은 게임 이용자들의 항의를 이유로 이 성우의 목소리를 게임에서 삭제했다.
고결한 이상과 사업의 성패는 별개다. 하지만 블록체인 기업들은 하나같이 고결한 이상을 강조한다. 거대 기업의 이익이 아니라 이용자의 권익을 향상시키겠노라 외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이용자의 절반은 여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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