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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이 구역의 설명충은 접니다 / 이명석

등록 2019-02-22 18:31수정 2019-02-23 14:06

이명석
문화비평가

카페에 앉아 있는데 경찰이 외국인을 데리고 들어왔다. 가게 주인에게 뭔가 물어보는데 ‘커피 어쩌고’를 찾는 것 같았다. 나는 카페 중독자다. 동네 구석구석, 교회 사랑방 같은 곳까지 찾아가본다. 그러니 이 구역의 카페는 내게 물어봐야지. “혹시 카페 찾으시나요?” 나는 이 말을 혀끝까지 꺼냈다가 황급히 빨아들였다.

얼마 전의 일이 떠올랐다. 전철역 입구에서 외국인이 지도와 도로 표지판을 번갈아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와드릴까요?”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도의 붉은 동그라미를 가리켰다. 나는 능숙하게 최적의 경로를 알려주었다. 그런데 그런 느낌 있지 않나? 그는 내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내 말이 끝나자 고개만 까딱하고 제멋대로 가버렸다. 내가 쓸데없이 ‘설명충’처럼 행동했나? 혹시 ‘현지인 도움 없이 길 찾기 게임’을 방해한 걸까?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낯선 도시의 행인에게 이 말을 꺼내기란 쉽지 않다. 한두번 쌀쌀한 외면을 당해봤다면 더더욱 어렵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반대의 말도 의외로 쉽지 않다. 먼저 친절을 베풀려다 무안을 당하는 경우도 분명히 생긴다. 여행자는 친절을 빙자한 호객꾼을 경계하고, 현지인은 괜한 오해를 살까 꺼린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았다. 스페인의 발렌시아에 갔을 때 중심가의 숙소를 구하지 못해 관광안내소를 통해 변두리의 호스텔을 안내받았다. 버스를 내려 두리번거리자, 사방에서 주민들이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다 한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여긴 왜 왔니?” 관광객이 올 곳이 아닌데, 라는 느낌이었다. 친구가 호스텔 이름을 말하자, 주민들이 몰려들었다. “버스를 잘못 내렸나 보네.” “얼마 전에 이름 바뀐 거기인가?” “여기 모퉁이 호텔로 가. 거기가 나아.”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친절 배틀’을 벌였다. 오사카에서는 잘 차려입고 바삐 걸어가던 여성이 우리의 불안한 눈빛을 외면하지 못했다. 말이 잘 안 통하자, 휴대전화로 약속을 연기하고 직접 숙소로 데려다주었다.

나는 그 빚을 갚아야 한다. 적어도 내 구역의 길 잃은 양들은 지나치지 말자. 경복궁 근처에 살 때는 그럴 기회가 많았다. 하지만 상대가 내 도움을 편하게 받아들일까, 하는 마음에 쉽게 말을 걸지 못했다. 일단 주변에서 어슬렁대며 ‘나, 이 동네 잘 알아요. 뭐든 물어봐요’라며 텔레파시를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좀더 쉽게 나를 이용하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열리는 ‘미시시피 피크닉’에 간 적이 있다. 옛날 미시시피 강변에서 열리는 소풍을 재현하며 미시시피 지역의 농산물, 문화, 대학교 등을 알려주는 작은 박람회였다. 그곳 자원봉사자들이 입은 티셔츠의 문구가 내 눈을 당겼다. ‘미시시피에 대해 물어보세요.’(Ask me, Mississippi.) 나는 그 옷을 하나 얻어 왔는데, ‘미시시피’ 자리에 다른 글자를 넣어볼까 한다. ‘애스크 미 서촌’ ‘애스크 미 동네 카페’…. 궁금한 사람은 말을 걸 테고, 나는 걸어다니는 민간 관광안내소가 된다.

뭔가 알려주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사람들은 누구나 이 방법을 활용할 수 있다. 가령 시위대 주변에는 이런 설명 부대를 배치하면 어떨까? ‘애스크 미 최저임금’ ‘애스크 미 낙태죄’…. 물론, 평소에도 입고 다니며 사람들의 궁금증을 해결해줘도 좋다. 그리고 길을 갑자기 막고 “눈빛이 맑으시네요” 하는 분들도 이런 옷을 입어주면 좋겠다. ‘애스크 미 도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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