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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주진형 칼럼] 정기주총, 그 씁쓸함에 대하여

등록 2019-03-05 18:28수정 2019-03-06 09:31

주총의 핵심 기능은 이사 선출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상법에서 상정하는 회사의 지배구조가 로마 공화정 및 그에 기반한 서구 민주국가의 지배구조와 매우 흡사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이사

정기주총 시즌이 곧 다가온다. 한국의 정기주총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3월말에 몰아서 한다. 둘째, 공산당 전당대회처럼 대부분 각본에 짜맞춘 의례적인 행사다.

왜 주총을 3월말에 몰아서 할까? 한국의 자본시장법 때문이다. 우리나라 기업은 대부분 12월31일이 결산일이다. 자본시장법상 사업보고서 제출 기한은 회계연도 종료 이후 90일 이내이다. 한국에선 금융당국이 사업보고서 제출을 하기 전에 주총에서 승인을 받아 올 것을 요구한다. 그러니 꼼짝없이 3월말에 주총을 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업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결산 회계 정보다. 주총에 참석한 외부 주주가 그 내역의 잘잘못을 알 수 없다. 이를 주총 의결을 거쳐 갖고 오라고 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사업보고서 확정이 정기주총의 주요 역할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바보같은 자본시장법 조항은 일본 것을 베껴 만든 것이다. 그래서 전세계적으로 한국과 일본에서만 이렇게 주총 시즌이 3월말에 몰린다. 이에 반해 미국이나 다른 나라들은 주총과 상관없이 사업보고서를 먼저 확정한 후 시간적 여유를 갖고 4월과 5월 중에 주총을 한다.

그럼 원래 정기주총은 무엇을 하는 행사인가?

주총의 핵심 기능은 이사 선출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상법에서 상정하는 회사의 지배구조가 로마 공화정 및 그에 기반한 서구 민주국가의 지배구조와 매우 흡사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로마 공화정은 집정관, 상원, 민회로 권력을 분리하여 견제와 균형을 꾀했다. 마찬가지로 현대 민주제를 행하는 나라들은 국민들이 정기 선거를 거쳐 의원을 뽑아 입법과 국정 감시를 맡긴다. 국민은 정당이 공천한 후보 중에서 의원을 투표로 선출한다. 가장 많은 후보가 의원으로 선출된 정당이 정권을 잡고 그 당의 지도자가 수상이 되어 행정부 수반이 된다.

서구의 상법상 회사 지배구조는 이러한 국가 지배구조를 차용한 것이다. 주주는 유권자로서 정기주총을 통해 이사를 뽑는다. 그 이사는 주주가 추천한 후보 중에서 뽑는다. 대표이사는 이사들이 뽑거나 주총에서 직접선거로 뽑아 그에게 경영을 위임한다. 즉 회사의 이사는 국가로 치면 국회의원이고, 이사회는 국회, 대표이사는 수상이다.

후보를 내는 정당에 해당하는 것은 대주주다. 1인1표가 아니라 1주1표이기 때문이다. 상당 지분을 가진 주주가 정당 역할을 대신해서 후보를 제시한다. 문제는 후보를 낼 만한 상당 지분을 갖고 있는 대주주가 하나일 경우 정당도 하나밖에 없게 되고, 그 결과 그가 후보로 내세우는 인물만 이사가 된다는 점이다. 옛날 유신정권 시절 박정희는 국회의원 3분의 1을 지명해서 유정회를 운영했는데 지금은 사외이사가 바로 그 유정회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정회와 사외이사는 꿀맛에 취한 교수나 퇴물 관료로 채운다.

20년 동안 사외이사제와 소액주주운동을 통한 재벌개혁 노력이 별 성과를 내지 못했던 구조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부분 한국 회사의 주주 구성은 1대주주와 소액주주로 이루어져 있다. 재벌총수 일가는 자기 가족이 가진 지분은 4~5%밖에 안 되면서도 계열사 출자를 통해 보통 20~30% 이상의 지분을 통제한다. 이 1대주주에 대항해서 자기가 미는 이사 후보가 당선되게 할 힘이 있는 다른 대주주가 한국에선 드물었다. 한국 기업의 1대주주들은 자기가 지명한 이사들로만 이사회를 채우고 자기들 입맛대로 회사를 통제한다. 말만 선거를 통해 뽑은 이사회일 뿐 실제로는 일당독재다.

다른 정당, 다른 대주주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개인이 기업 지분을 5~10%나 갖기가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유일한 대안은 기관투자가다. 실제로 서구에선 기관투자가가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반 이상을 갖고 있다. 다당제의 여건이 갖춰진 것이어서 야당, 즉 기관투자가의 의견을 이사회가 무시하지 못한다. 이들은 이사회에 직접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전달하거나 주총을 통해 자기가 지명한 후보를 내세워 이사 자리를 얻어내기도 한다.

요즘은 기관투자가의 지분이 늘어나 보통 20%를 넘는다. 한국의 기관투자가는 지금까지는 재벌의 눈치를 보느라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앞으론 달라져야 한다. 궁극적으로 기업지배구조 개선은 주총을 통해 독립성과 전문성이 보장된 이사회를 선출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당정치를 통해 여야로 구성된 국회 없이 민주주의 정치가 불가능한 것과 같은 이치다. 지금과 같은 일당독재 세습체제를 막기 위해선 야당에 해당하는 기관투자가가 정기주총에서 이사 선출에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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