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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사람을 물리치지 않는 사람들 / 은유

등록 2019-03-08 16:33수정 2019-03-08 20:21

은유
작가

괴산시외버스터미널 대합실에 갔더니 연탄난로가 서 있다. 학창 시절 교실에서 보곤 처음이다. 동창이라도 만난 듯 다가갔다. 불 꺼진 난로 옆에 연탄 여덟개가 대기 중이다. 어릴 적 엄마랑 외출했을 때 엄마는 연탄불이 꺼질까봐 늘 발을 동동거렸다. 연탄구멍 사이로 엄마의 초조한 눈빛이 보인다. 너는 누구를 위해 한번이라도 연탄을 갈아봤느냐, 유명한 시구를 내 맘대로 고쳐 써본다. 대합실 벽면엔 ‘축 발전’이 새겨진 거울이 걸려 있다. 서울에서 고작 두시간 이동했는데 다른 시간대에 떨어진 영화 주인공처럼 나는 두리번거린다.

괴산 솔멩이마을에 글쓰기 강연을 왔다. 섭외 제안이 연애편지 같았다. 진즉에 초대하고 싶었는데 못 하다가 사업비가 생겨서 부른다는 사연. 가난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괴산이라서 더 그랬을까. 괴산은 빈민운동가 정일우 신부가 88올림픽을 앞두고 상계동이 철거되자 터를 잡은 곳이다. 이곳에서 땅을 살리는 유기농법 전파에 힘을 쏟았다. 그의 다큐멘터리 <내 친구 정일우>에서 그는 말한다. “더 가난해졌으니까 잘된 것이다. 가난해야 천국에 가깝다.” 이 말뜻을 이해하고 싶어서 괴산에 가보고 싶었다.

강연을 주선한 엄 선생님이 터미널에 마중을 나왔다. 차를 얻어 타고 가는데 점심을 먹자고 한다. 식사 초대는 매번 딜레마다. 강연 전에 낯선 사람과 식사를 하면 기운을 뺏기고, 강연 후엔 기운이 소진돼 밥이 안 넘어간다. 정중히 사정을 말하고 사양하곤 한다. 때마침 남은 시간도 빠듯해 핑계도 적당했다. 그런데 웬걸, “강연에 좀 늦어도 돼요. 밥 먹고 갈 테니까 차 마시면서 기다리라고 했어요” 한다.

메뉴는 김치찜. 윤기가 반들반들 흐르는 묵은지를 보자 침이 고인다. 반찬으로 나온 계란말이도 특별했다.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한 조리법인데, 노란 테두리에 하얀 속살 사이사이 오색 채소가 박힌 도톰한 계란말이는 젓가락 대기도 아깝게 고왔다. 계란말이에 대한 찬사를 건네자 주인이 그런다. “계란말이만 7년을 연구했어요.” 그 말이 내겐 ‘이 원고는 퇴고만 7년 했어요’로 들렸다. 평소 농담처럼 말하지만 글은 밥과 경쟁한다. 밥 한그릇만큼 필요와 만족을 채워주는 글을 쓰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예정대로 10분 지각했다. 강연에 늦고도 이토록 속 편한 것도, 수도가 얼어 화장실을 쓰지 못하는 강연장도, 마을회관 같은 오붓함도 처음이다. 암막 커튼이 없고 햇살이 눈부셔서 스크린이 희미하게 보였지만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두시간이 태평하게 흘렀다. 강연료가 적어서 미안하다며 엄 선생님이 꾸러미를 건넸다. 직접 농사지은 쌀로 만든 누룽지, 딸기잼, 블루베리잼, 계란, 술이 한보따리다.

“산이 참 깊네요.” 들어올 때 안 보이던 풍경 나갈 때야 보인다. 울울창창한 산세에 감탄하는 내게 엄 선생님 말한다. “저 아랫마을에 사는 할머니들은 산에서 내려온 호랑이를 봤다고 해요.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으면 머리는 남기고 몸통만 먹는대요. 멧돼지는 머리까지 다 먹고요.” 전래동화처럼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하지만 본 적 없는 공룡도 믿는데 할머니가 본 호랑이를 못 믿을 건 무언가. 자연에서 반나절, 시간 엄수, 근거 확립, 신속 정확 같은 도시의 감각에서 잠시 놓여나니 마음이 들녘처럼 넉넉해진다.

<내 친구 정일우>의 원래 제목은 ‘사람 물리치지 않는 정 신부’였다고 한다. 사람 물리치지 않는 사람 품은 고장에서, 그가 말하곤 했던 사람 물리치지 않는 주문을 되뇌어본다. “사람은 누구나 깨진 꽃병이다. 이렇게 막고 저렇게 막고 해봤자 깨진 걸 숨길 수 없다.” 연탄난로와 깨진 꽃병의 마음이 있는 그곳이 천국이겠구나 생각하며 서울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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