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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장자연 사건 이후 잃어버린 10년 / 권김현영

등록 2019-03-12 18:11수정 2019-03-13 11:04

권김현영
여성학 연구자

장자연씨가 세상을 뜬 지 10년이 지났다. 사건의 실체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는 데에는 유력 일간지 사장 일가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이었다. 하지만 최근 강남 클럽과 연예계를 뒤흔든 사건들을 보면서 생각이 좀 달라졌다. 문제는 가해자가 누구인지에 있는 게 아니라 성상납과 성접대 자체가 심각한 문제라는 점을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장자연씨 이후 몇몇 여성 연예인들은 소위 스폰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고 ‘미투’를 했지만 우리 사회는 엉뚱하게 제안을 한 쪽이 아니라 받은 쪽이 어떻게 했는지를 궁금해했다. 결과적으로 제안을 수용했다고 알려진 여성 연예인은 법정에서 성매매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고 법정 바깥에서는 여론 재판을 받은 반면, 이 문제에 가담했던 연예기획사와 브로커들 대부분은 증거불충분 혹은 혐의없음의 판결문을 날개옷처럼 손에 쥐고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확장했다.

2009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된 ‘여성연예인 인권침해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은 여성 연예인 지망생이나 신인 여성 연기자들을 일종의 상품으로 만들어서 사회 유력 인사들에게 제공했고, 사회 유력 인사들은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들과 유흥을 즐기며 광고 계약과 방송 출연 등을 빌미로 성접대를 받았다. 방송, 광고 등에 영향력을 미치는 유력 인사와의 자리는 비공식 오디션의 성격부터 성매매 알선이라는 범죄적 성격까지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있다.

‘장자연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로 알려진 고인의 동료 배우 윤지오씨가 12일 오후 서울동부지검에 설치된 대검찰청 검찰 과거사 진상조사단에 참고인 자격으로 출석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장자연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로 알려진 고인의 동료 배우 윤지오씨가 12일 오후 서울동부지검에 설치된 대검찰청 검찰 과거사 진상조사단에 참고인 자격으로 출석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 장자연씨 사건의 목격자 증언을 했던 윤지오씨는 자신의 책 <13번째 증언>에 이 구조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윤씨는 연예기획사 대표 ㄱ씨가 방송, 광고 관계자들이 모이는 자리에 자신을 부르는 것을 일종의 비공식적인 오디션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장자연씨도 당시 비슷한 자리에서 만났고, 같은 방식으로 몇번의 모임에 참석한 후 둘 다 해당 연예기획사와 계약을 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문제는 오히려 계약 이후에 벌어졌다. 계약만 하고 나면 연예인으로서의 연습과 준비를 하는 스케줄이 잡힐 줄 알았지만 계약 이후에 오히려 더 자주 그런 자리에 불려 나갔다. 윤씨는 그 과정에서 운 좋게 기획사에 계약금 2배를 물어주는 정도의 수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장자연씨의 상황은 훨씬 좋지 않았다. 대중에게 얼굴이 막 알려졌는데 소속사에서는 배우를 에로 영화에 사전 협의도 없이 전라로 출연하게 했고 성상납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커리어 관리가 전혀 안 되는 상태에서 장자연씨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장자연씨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이유는 스폰에 응했는지 아닌지, 술자리에서 접대를 했는지 아닌지, 그 결과 배역을 따내게 된 건지 등 여성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질문을 하는 사회였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달라졌을까. 클럽 버닝썬 사태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이 클럽의 관계자들은 강간을 가장 스릴 넘치지만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상품으로 기획했고 성공적인 접대를 위해서 여성의 몸을 상차림에 올렸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들이 대화방에서 스스로 자백했듯이 클럽에서의 강간과 성접대 모두 여자 탓으로 돌리면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매력 자본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유명 남성 연예인조차 여성에게 의사를 묻고 동의를 구할 노력을 굳이 하지 않고 약물강간과 불법적 성거래, 그리고 성관계 영상 유포 등의 범죄에 직간접으로 가담했다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더 악화된 것이다. 이번에는 ‘누가’의 문제를 넘어, 성상납 혹은 성접대라고 일컬어져왔던 폭력적인 성문화이자 현행법상 불법인 ‘성거래’ 전반을 문제 삼자. 그래야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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