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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다중의 자아와 동거하는 법 / 이명석

등록 2019-03-22 16:12수정 2019-03-22 19:14

이명석
문화비평가

어느 회의에서 까다로운 일을 부탁받자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저한테는 두 개의 자아가 있는데요. 하나는 그 일을 제가 맡는 게 맞다고 말해요. 그런데 다른 하나는, 아무리 그래도 이 돈으로 그 일까지는 아니라고 하네요.” 사람들은 웃어넘겼다. 하지만 회의실을 나오자, 내 안의 자아 연합체가 난리가 났다. “도대체 뭔 정신이야? 그렇게 다중의 자아를 노출하다니. 사회생활을 할 생각이 있는 거야?”

<인사이드 아웃>에서 <23 아이덴티티>까지, 요즘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여러 인격이 다투는 이야기를 자주 만난다. 음험한 범죄자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 속에도 여러 성격의 자아가 공존하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런 자아들을 관찰해왔다. 가령 ‘사투리 자아’가 있다. 평소 아나운서 급의 표준어를 구사하는 온화한 친구가 있는데, 부산 친구의 전화만 받으면 갑자기 ‘까리한데?’ 하며 거친 바다의 인격을 드러낸다. ‘외국어 자아’도 자주 보았다. 평소에는 자기 말만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친구가 영어를 쓸 때는 공손히 두 손 모으고 상대에게 귀기울인다.

‘집안 자아’와 ‘집밖 자아’가 다른 경우도 많다. 가족들을 대할 때는 시큰둥하고 대답도 잘 안하는 청소년이 바깥에서는 사근사근 모든 친구들을 챙겨준다. 부모들은 섭섭해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라. 생글생글 웃는 ‘영업 자아’에서 벗어나자마자 상소리를 토해내는 ‘막말 자아’로 전환하지 않는가? 나 역시 극단적인 ‘아싸’와 ‘인싸’를 오가는 도착적인 다중 자아의 소유자다. 평소에는 연락하는 친구도 거의 없는 외톨이인데 체육대회, 소풍, 파티 같은 단체 행사가 열리면 기뻐 날뛴다.

겉과 속이 다른 놈! 예전에는 이렇게 인격이 달라지는 사람을 욕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요즘은 냉탕 온탕을 오가는 성격의 변화에서 호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갭 모에’라는 대중문화 용어도 거기에서 나왔다. 오히려 자신의 자아를 쉽게 전환하지 못해 문제를 겪는 사람들도 보게 된다. 평생 고위직에 있다가 퇴임한 ‘어르신 자아’는 어디서든 대접받으려다 따돌림 당한다. 반대로 스스로를 ‘살림꾼 자아’로 고정시킨 사람도 있다. “난 괜찮아요. 편하게 놀아요” 하면서 어깨의 짐과 얼굴의 가면이 점점 무거워진다. 나는 이들에게 정반대의 자아를 경험해보기를 권한다. 살림꾼은 손끝 까딱 안 하고 대접받는 여행을 해보고, 어르신은 낯선 취미 모임에 들어가 굽신굽신하며 배우는 기분을 느껴보라고.

유념할 점이 있다. 다중의 자아가 무성히 자라면 범죄적 자아가 숨어들기 좋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이들이 익명의 가면 뒤에서 악성 댓글을 달고, 단체 카톡방에서 새내기의 외모를 평가하며 낄낄거린다. 버려진 동물을 구하는 천사인 척하면서, 몰래 그들을 없애는 일의 정당성을 꾸민다. 어쩌다 그 일을 들키면 이렇게 말한다. “또다른 자아가 시켜서 그런 거예요. 원래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명심하자. 내 안의 어떤 자아가 저지른 일은, 나의 다른 자아들이 함께 책임져야 한다. 그러니 더러운 자아를 역겨워하고, 부끄러운 자아를 교정할 수 있는 자아를 키워야 한다.

내가 가장 믿고 기대는 자아는 글쓰는 자아다. 그는 대충대충을 용서하지 않는다. 어설프게 뭉개면 안 돼, 더 나은 생각을 찾아내, 우리가 추구할 가치를 잊지 마. 그러기 위해 고치고 또 고치라고 한다. 내 실제의 삶은 비겁하고 남루하다. 그러나 글쓰는 자아와 주기적으로 만나는 덕분에 비틀거리지만 쓰러지지 않는다. 곰팡이처럼 기어나오는 더러운 자아들과 맞서 싸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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