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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선생님이 남긴 질문 / 김찬호

등록 2019-03-29 17:57수정 2019-03-29 19:13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에 큰 사고가 터진 적이 있다. 우리는 매일 수업이 끝나면 교실 청소를 했는데, 톱밥이 잔뜩 섞인 쓰레기를 운동장의 구석 아래 언덕배기에 버리도록 되어 있었다. 어른용 손수레에 쓰레기를 실어다가 쏟아붓는 일은 놀이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날, 영철(가명)이라는 아이가 혼자서 그 일을 하다가 손잡이를 놓치고 말았다. 언덕 아래에는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의 사택이 있었고, 하필이면 그 딸이 마당에서 놀다가 느닷없이 굴러 내려온 손수레에 머리를 다치고 말았다. 급하게 병원으로 옮겼으나 몇시간 뒤 숨을 거두었다.

학교 전체가 충격에 휩싸였다. 한 학년에 한 학급만 있는 작은 규모였기에 파장이 더욱 컸다. 수업이 이뤄질 수 없는 상황에서, 그다음 날 교장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너무 오래전이라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가물가물하지만, 딱 한마디는 생각난다. 아이들이 청소하며 장난친 것을 질책하다가, 영철이를 가리키면서 “김영철! 너는 살인마야!”라고 소리쳤다. 그때 영철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울먹이던 장면은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순전히 실수로 사고를 낸 초등학생이 살인마로 낙인찍히다니, 많이 무서웠다. 그것은 학급 전체에 가해진 폭언이자 저주이기도 한데, 우리 가운데 누구라도 사고를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졸업 이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영철이가 지금도 자꾸 떠오르는 것은 그의 상처에 나도 닿아 있기 때문이리라.

당시 지금의 내 나이쯤이었을 교장의 마음을 상상해본다. 사고가 났을 때 어떤 감정에 휩싸였을까. 아마도 죄의식과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위험한 비탈에 아이들이 커다란 손수레로 쓰레기를 날라다가 버리도록 한 것은 일차적으로 교장의 책임이다. 학생들에게 안전교육을 해준 적도 없었으니 관리 소홀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분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기는커녕, 모든 것을 학생들의 탓으로 돌렸다. 그렇지 않아도 자책감으로 떨고 있는 아이에게 살인마라고 삿대질했다. 그는 내 인생에서 만난 가장 비겁하고 잔혹한 어른 가운데 한 명으로 기억된다.

사건을 둘러싼 또 한 가지 중요한 장면이 그 뒤에 이어진다. 딸의 장례를 치른 다음 날 담임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셨다. 의외로 평온한 표정이셨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차분하게 되짚으신 다음, 평소처럼 수업을 시작하셨다. 하지만 그 가슴속에 어떤 감정이 출렁이고 있었을지 지금에야 짐작이 된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또 한 가지 사실에 새삼 놀란다. 그 선생님이 6학년 때도 우리 반을 맡으셨다는 것이다. 당신의 선택이었음이 분명하다. 영철이를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아이를 볼 때마다 딸이 떠올랐을 텐데도, 그 응어리를 품어주고 싶었으리라. 피해자보다는 책임자의 정체성이 앞섰던 것이다. 졸업 사진에 찍힌 영철이의 밝은 낯빛은 당신께서 아이를 따스하게 보듬어주셨음을 짐작하게 한다. 우리 학우들도 이후에 그 사건의 그늘에 시달리지 않았다.

파국은 인간의 바닥을 드러나게 한다. 학교 안에서 벌어진 대형 사고 앞에서, 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은 전혀 다르게 대처하셨다. 그 상반된 모습은 크고 작은 재난이 끊이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계속 재현된다. 보신에 급급해하며 힘없는 이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마음, 자신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 넘어진 이웃의 손을 잡아주는 마음. 두 힘은 세상 곳곳에서 줄다리기한다. 그리고 내 안에서도 종종 맞서는 듯하다. 대개 어느 편으로 기우는가. 나는 어떤 어른으로 살아가는가. 고인이 되셨을 선생님이 말을 걸어오신다. 50여년 전의 기억은 준엄한 질문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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