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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역사 정의와 외교 현실의 충돌 / 박병수

등록 2019-04-02 18:17수정 2019-04-02 18:59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 강제동원 피해자와 가족 등이 승소 판결이 난 2018년 10월30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에 들어서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 강제동원 피해자와 가족 등이 승소 판결이 난 2018년 10월30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에 들어서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일제 강제징용 배상을 둘러싼 한-일 갈등이 갈수록 누가 겁쟁이인지를 가리는 ‘치킨 게임’ 양상이 되고 있다. 대법원이 지난해 10월 신일철주금, 미쓰비시 등 일본 기업에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했으나, 일본 정부는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된 문제”라며 해당 기업에 ‘배상 거부’ 지침을 내렸다.

징용 피해자 쪽은 일본이 끝내 응하지 않을 경우 이들 기업의 압류 자산을 매각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산 매각이 집행되면 일본 정부는 보복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보복 관세 등 제재는 일본에도 피해가 커 단행하기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 있지만, 아베 신조 정부가 그냥 넘어갈 가능성은 작다. 일본의 제재는 또 한국의 대응을 부를 수밖에 없어, 자칫 한-일 간 초유의 경제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다.

한-일 과거사 갈등은 오래된 일이다. 그런데도 이 시점에 유독 거친 파열음이 나는 데는, 두 나라 정치환경을 둘러싼 여건과 상황 변화가 바탕에 깔려 있다. 냉전 시절 안정적인 한-일 관계는 경제발전을 위해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필요한 한국에나, 한반도를 안보의 생명선으로 여겨온 일본에, 또 한-일 양국을 동아시아 반공의 보루로 묶어세우려던 미국에 모두 중요했다. 따라서 과거사 문제는 한-일 관계를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봉합하도록 강요됐다.

상황은 1990년대 이후 냉전 해체와 한국의 민주화 진전, 한-일 간 경제격차 축소 등이 맞물리며 바뀌었다. 그동안 억눌려온 과거사 진상규명과 피해자 배상 요구가 분출한 것이다. 이에 아베 정부가 국내의 우경화 분위기를 업고 강경 대응을 천명하면서, 과거사 갈등이 극으로 치닫고 있는 실정이다. 북핵 위협이 불거진 1990년대 중반 이후엔 한-일 관계를 한-미-일 3각 안보협력의 틀에서 관리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마저 최근 한반도 정세가 대화 국면으로 전환되면서 실효성을 잃었다.

미봉책이든 뭐든 당장 일제 강제징용 배상 문제가 양국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을 막으려면 외교적 해법 모색이 불가피하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한-일 외교당국은 얼마 전 실무접촉을 하고 협의를 벌였으나 서로 입장 차이만 확인했을 뿐이다.

아베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이젠 한국 정부가 알아서 해결할 문제”라며 타협 불가 입장이다. 미쓰비시의 경우 애초 이번 소송 과정에서 비교적 유연한 자세였다. 그동안 징용 피해자 쪽과 10여차례 협의를 했으며, ‘피해자에게 직접 배상하는 건 곤란하지만 가족을 위한 장학기금 설립 방식 등의 보상은 검토할 수 있다’는 제안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법원 판결 후 일본 정부가 ‘배상이나 화해 등에 응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린 뒤 태도를 바꿔 협의 요청에 전혀 응하지 않고 있다.

문재인 정부도 외교 교섭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징용 배상이 사법부의 판결이어서 삼권분립상 정부에 재량권이 별로 없는 게 사실이다. 역사적 교훈도 있다. 1965년 청구권 협정이나 2015년 위안부 합의는 과거사를 외교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피해자 요구를 외면한 이들 외교적 타협은 갈등 해소에 실패했고, 나중엔 새로운 분란의 불씨가 됐다. 섣부른 외교적 타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방치는 정부의 직무유기에 가깝다. 현재 한-일 관계 흥망의 무거운 짐은 온통 징용 피해자들이 짊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배상을 받아내려면 일본 기업 압류 자산의 현금화 절차를 밟아야 하지만, 이 경우 일본이 보복조처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이는 자칫 한-일 간 정면충돌로 비화할 사안이어서 징용 피해자들 개인 차원에서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문제다.

어떻든 국가 전체에 영향을 끼칠 사안인 만큼 정부가 나설 수밖에 없다. 이해당사자인 징용 소송 대리인단이나 민간 전문가들과도 두루 소통하며 의견을 구하고, 일본에도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나서야 한다. 당장 해법을 찾기 어렵다고 지레 포기하고 방치하기엔 너무 리스크가 크다.

박병수
논설위원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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