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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종구 칼럼] ‘촛불 산불’, 그 비루한 ‘저주와 참언’

등록 2019-04-10 21:55수정 2019-04-11 09:41

김종구
편집인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는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 공천으로 경기 부천 소사구에 출마했다. 상대는 새정치국민회의 박지원 후보였다. 우파로 전향한 급진 노동운동가 출신 여당 후보와, 뛰어난 언변으로 이름을 날리던 야당 대변인 간의 흥미로운 대결이었다. 선거전이 종반으로 치닫던 어느 날, 이원종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은 출입기자들에게 “김문수 후보가 100% 이긴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면서 매우 묘한 말을 했다. “김문수씨는 언제부터 그런 기술을 익혔는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섭게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오랫동안 정치를 해온 우리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이 수석은 “운동권 내부의 권력투쟁에 오랫동안 단련이 돼서 그런 것 같다”는 나름의 해석까지 덧붙였다. 자기네 후보가 이길 것에 흐뭇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흑색선전 등 비열한 선거운동 행태에 냉소를 날리던 이 수석의 묘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김 전 지사의 “촛불정부, 산불정부” 발언을 접하면서 다시금 그때의 장면이 되살아났다. ‘이 사람은 정치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비열한 행태가 바뀌지 않는구나.’ 과거의 동지들을 앞장서 공격하고, “박정희 동상을 세우자”고 주장하고, 세월호 유족들을 향해 “죽음의 굿판을 벌이는 자들은 물러가라”고 호통치는 등 그의 망가진 모습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번 발언은 그 정점을 찍었다.

“촛불정부, 산불정부!” 이것은 증오에 가득 찬 저주이자 마법을 부르는 주문이다. ‘불로 흥한 자, 불로 망한다’는 흉측한 참언이다. 재난 사태를 호재 삼아 국민의 불안감을 자극하고, 정부에 대한 불신을 부추기며, 사람들의 집단적 허무주의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대여 공세의 무기가 되는지를 김 전 지사는 잘 안다. 저주와 주문, 참언이 온 누리에 창궐해 국민의 영혼을 감염시키길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김 전 지사만이 아니다. 이미 야당과 그 지지세력들은 재난의 정치공세화에 앞장서고 있다. 객관적 통계 수치를 외면한 채 “현 정권 들어 화재 발생이 급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이 신문의 날 행사를 마치고 언론사 사장과 술을 마시느라 대응이 늦어졌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개인적으로 마침 그날 행사에 참석했다가 대통령이 떠나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사람으로서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런데도 자유한국당과 대한애국당 등 야당 의원들은 일부 유튜브 방송의 주장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며 국회에서 정치쟁점화한다. ‘가짜뉴스 생성과 유통, 정치적 활용’의 전형적 예가 아닐 수 없다.

박근혜 정권 몰락의 원인은 분명히 ‘물’이었다. 세월호 사건 이후 정권은 서서히 깊은 물속으로 빠져들었고 영영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이 정권의 반대세력은 문재인 정부가 ‘불’로 망할 수도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박 전 대통령의 ‘7시간 미스터리’를 잘만 벤치마킹하면 문 대통령을 꼼짝 못 할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들이 연일 ‘불의 나라’를 소리 높이 외치는 이유다. 그러나 그들이 놓치는 것이 있다. 전 정권이 자멸한 것은 단순히 재난의 관리·대처 소홀 때문이 아니었다. 권력 방어에만 급급한 비겁함,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무감각, 잘못에 대한 뉘우침과 진정성의 부재, 공적 개방성을 외면한 비밀주의, 이런 것들이 진정한 침몰의 원인이었다.

현 정부 역시 방심하거나 자만에 빠질 일은 아니다. 이번 산불 진화에는 성공적으로 대처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재난재해를 무사히 넘기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산불 사태만 해도 헬기의 야간진화 시스템 정비, 발화 전기시설의 지중화 작업, 재난 방송의 신속한 대처 등 해결해야 할 과제를 많이 제시했다. 점차 태풍과 홍수 등 자연재난보다 화재·붕괴·폭발, 전염병, 국가기반체계의 마비 등 사회적 재난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안전 관리 문제의 총체적 재정비도 시급한 과제로 등장했다. 남 탓, 자기방어용 변명, 책임의 방기 등 과거 정부의 잘못은 이 정부가 늘 반면교사로 가슴속에 새겨야 할 명제다. 더 근본적으로는, ‘세월호 사건 이후 과연 우리나라가 안전한 나라가 됐느냐’는 물음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는 것이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다시 봄이 왔다. 쏟아지는 햇빛 속에 눈부신 4월은 생명의 함성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팽목항 앞바다에도 봄빛이 완연히 쏟아질 것이다. 살아있음으로 눈물겹고, 그리움으로 가슴 시린 계절이다. 이 찬란한 봄날의 슬픔 속에서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제당에 모셔놓고 저주와 주문과 참언을 되뇌는 것은 얼마나 비루한 짓인가.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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