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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책방 ‘풀무질’ 살리기 (1) / 전범선

등록 2019-04-12 18:11수정 2019-04-12 20:46

전범선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책방 풀무질이 폐업 위기에 처했다. 풀무질은 1986년부터 성균관대학교 앞을 지키고 있는 인문사회과학 책방이다. 80년대에는 대학가마다 이런 책방이 많았다고 한다. 학생들이 모여 책도 읽고 술도 먹고 더 나은 세상을 꿈꿨다. 민주, 평화, 통일을 이야기했다. 그러다 나가서 시위도 했다. 그 시절 덕분에 대한민국은 버젓한 민주국가가 되었다. 평화통일은 아직 못 이뤘지만.

28살 청년 은종복은 1993년 풀무질을 인수했다. 26년이 지난 오늘, 그의 머리는 새하얗다. 참 오래, 잘 버텼다. 돈보다 뜻이 먼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동안 인문사회과학 책방은 하나둘 사라졌다. 서울에 딱 두 곳 남았다. 서울대 앞 ‘그날이 오면’도 축소 이전하여 겨우 명맥을 지키고 있다. 54살 은종복씨는 2019년 새해가 밝자 결단을 내렸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1월7일치 <한겨레>에 기사가 났다. “책방 정신 계승할 인수자를 찾는다.” 나는 은 대표님이 나를 찾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나는 풀무질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영미권에서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한국 대학가 책방에 대한 개인적인 향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확신했다. 이 책방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 살리고 싶다. 그리고 왠지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어머니가 예전에 헌책방을 하셨다는 것과 역사학 전공인 내가 인문학 책방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분히 감상적이지만, 그만큼 결정적인 이유였다.(그 후 소급 적용한 나름의 합리적 변론은 다음 칼럼에서 밝히겠다.)

나는 무작정 풀무질을 찾아갔다. 함께 ‘두루미’ 출판사를 운영하는 고한준과 장경수도 배석했다. 은 대표님은 우리를 뜨겁게 안아주셨다. 서러움과 반가움이 섞인 눈물을 나는 보았다. 40평 지하 책방의 공기는 쾨쾨하지만 단단했다. 함석헌과 문익환부터 푸코와 플라톤까지 숨쉬고 있었다. 분명 낯선 곳인데 아주 익숙했다.

면접 아닌 면접이 있었다. 은 대표님은 세가지를 보셨다. 첫째, 젊어야 한다. 책방 일은 중노동이다. 풀무질을 살려서 오래 이어가려면 힘있는 청년이 해야 한다. 두루미 일동은 20대 장정들이라 가볍게 통과했다.

둘째, 어느 정도 인문학에 조예가 깊은가. 손님에게 책을 소개하고 독서 모임을 이끌려면 기본 지식은 있어야 한다. 고한준은 가자마자 90년대 진보 잡지 <이론>이 있냐고 물어서 점수를 땄다. 나는 로크의 <통치론>을 읽었냐는 질문에 “아 그게 혹시 ‘Two Treatises of Government’(통치론의 원서 제목)인가요?”라고 답해서 좌중의 밥맛을 약간 떨어뜨렸으나 대표님은 좋아하셨다. 장경수는 들뢰즈에 대한 자신의 지론을 밝혔고, 시인이라는 점에서 멋진 인상을 남겼다.

셋째는 성실성이었다. 나는 여기서 탈락했다. 가수가 본업인지라 책방에 진득하니 있지 못할 것 같다고 하셨다. 맞는 말씀이었다. 하지만 장경수와 고한준은 얼굴에 ‘근면’이라고 쓰여 있는 사람들이다. 대표님은 그들을 믿기로 하셨다.

이로써 책방 ‘풀무질’을 살리기 위한 풀무질이 시작되었다. 1억5천만원 상당의 부채가 있었다. 그중 대표님이 1억원을 메우고, 나머지 5천만원은 우리가 어떻게든 만들어보기로 했다. 3월부터 장경수가 출근하여 인수인계를 받고 있다. 1차 모금운동에는 1천여명이 참여하여 2500만원이 모였다. 몇몇 출판사는 빚을 깎아주었다. 참 감사한 일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올해 28살이다. 26년 뒤 2045년, 내가 54살이 되었을 때도 풀무질과 함께하고 있을까? 그때는 우리가 평화통일을 이루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은 대표님처럼 나도 머리가 새하얗게 바뀌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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