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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승욱의 증상과 정상] ‘우리들의 죽음’

등록 2019-04-14 17:43수정 2019-04-15 13:25

“…젊은 아버지는 새벽에 일 나가고 어머니도 돈 벌러 파출부 나가고 지하실 단칸방엔 어린 우리 둘이서 아침 햇살 드는 높은 창문 아래 앉아 방문은 밖으로 자물쇠 잠겨 있고 윗목에는 싸늘한 밥상과 요강이 엄마 아빠가 돌아올 밤까지 우린 심심해도 할 게 없었네. 낮엔 테레비도 안 하고 우린 켤 줄도 몰라. 밤에 보는 테레비도 남의 나라 세상 엄마 아빠는 한번도 안 나와. 우리 집도 우리 동네도 안 나와. 조그만 창문의 햇볕도 스러지고 우린 종일 누워 천장만 바라보다 잠이 들다 깨다 꿈인지도 모르게 또 성냥불 장난을 했었어. 배가 고프기도 전에 밥은 다 먹어치우고 오줌이 안 마려운데도 요강으로 우린 그런 것밖엔 또 할 게 없었네. … 옆방에는 누가 사는지도 몰라. 어쩌면 거긴 낭떠러지인지도 몰라. 성냥불은 그만 내 옷에 옮겨붙고 내 눈썹 내 머리카락도 태우고 여기저기 옮겨붙고 훨훨 타올라 우리 놀란 가슴 두 눈에도 훨훨….”(정태춘 1990년 발표, ‘우리들의 죽음’)

세상은 그때와 많이 달라졌다. 가장 달라진 것이라면 아이들이 죽기도 전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화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는 먼 나라 옛날얘기가 아닌 것 같다. 돈에 눈멀어 아이를 잃어버린, 욕심에 열정적인 지금 여기, 현재 이야기다. 아이들이 눈치 안 보고 밥 좀 편하게 먹게 하자는데 그 밥 뺏어 먹으려는 정치가가 너무 많고, 그들은 힘도 강력하다. 2년마다 이사 안 다니고 안정적으로 아이들 키울 수 있게 장기임대주택을 짓자고 하면, 내 동네에는 못 들어온다고 핏대 세우는 마음이 궁핍한 어설픈 중산층은 더 많다. 수백만원짜리 유모차, 수백만원 영어 유치원, 수천만원 족집게 과외선생과 코디까지, 올려다보니 너무 아득해서 우리의 아이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부모들의 마음에서 지워진다. 가져보지 못한 것의 상실로 채워지는 이 세상은 우리들의 죽음을, 한 사회의 멸종을 가속한다.

세상은 어쩌면 훨씬 더 나빠져 있다. 80년대 후반, 교사로 채용돼서 받은 내 첫 월급은 당시 대학 한 학기 등록금을 얼추 맞출 수 있는 액수였다. 지금은 대졸자 초봉을 두세달 모아야 한 학기 등록금과 비슷하다. 적어도 세상은 두세배 나빠진 것 같다. 새로운 가난이 찾아온 것이다. 쥐꼬리처럼 떨어지고 뱀 대가리처럼 치솟는 집값. 아이를 잘 키울 자신이 없는 부모들은 결국 마음에서 출산을 지우기로 한다. 몇백년 뒤에는 산술적으로 한국 사람은 멸종되고, 이미 몇몇 지방 도시들은 멸실이 되고 있다.

지난 정부는 더 말할 것도 없지만 현 정부조차 장관 후보자, 헌법재판관 후보자 청문회를 보면 분노도 좌절도 일지 않는다. 그저 냉소와 비아냥, 그뿐이다. 겉늙은 나도 그럴진대 젊은 부부들의 눈에 이 사회는 믿을 곳 없는 타지일 뿐이다. 이제 아이를 낳으라는 말도 하지 말라.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이 정말 걱정하는 것은 아이들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을 기득권으로 가능하게 할 착취의 대상들이 사라지는 것이리라. 교육이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아이들을 살리는 것만으로도 힘에 겹다. 더 이상 아이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이들을 낳지 말라. 이것이 오히려 더 윤리적이지 않은가.

무엇보다, 다 큰 생때같은 아이들 수백명을 숨지게 해놓고 5년이 지나도록 진상조차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30년 전 지하 단칸방에 갇혀 불에 타 죽은 아이들과, 불과 몇년 전 배에 갇혀 수장된 아이들의 죽음은 바로 우리들의 죽음이다. 청소년 자살률 1위, 청소년 자해율 18%의 나라, 우리들은 아이들을 죽이고, 우리들도 죽어간다.

닛부타의숲 정신분석클리닉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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