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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합의 이행’이 신뢰의 출발이다 / 박병수

등록 2019-04-18 17:17수정 2019-04-18 19:41

박병수
논설위원

지난해 합의된 남북간 교류사업들이 줄줄이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남북은 4월부터 비무장지대(DMZ) 공동유해발굴을 하기로 합의했지만, 북쪽이 응하지 않아 남쪽만 ‘단독’ 유해발굴을 하고 있다. 남북 민간 선박의 한강하구 공동이용도 남북이 공동으로 수로 조사를 마치고 4월부턴 시범운항을 하기로 했으나, 아직 북쪽으로부턴 감감무소식이다. 지난달엔 북쪽이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전격 철수를 선언했다가 사흘 만에 슬그머니 일부 인원을 복귀시켰으나, 여전히 정상 복구와는 거리가 먼 것 같다.

북한이 휴전선 주변 완충구역 설정이나 지피(GP) 철수 등 합의 사안을 선뜻 이행하고 나섰던 지난해와 달리, 이렇게 소극적으로 돌아선 배경에 2월 말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의 실패가 있다는 데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예기치 못한 합의 무산에 따른 내부 충격을 추스르고 새로운 전략 노선을 정리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니 당장 이들 사업을 약속대로 해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운 사정이라는 걸 전혀 이해 못 할 건 없다.

그렇지만 북한이 보여준 태도는 유감이다. 누구에게든 약속을 어길 수밖에 없는 사정은 생길 수 있다. 사정상 약속이 연기되거나 변경되는 일도 없는 게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먼저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는 게 순서지만, 북한엔 그런 상식이 없다. 왜 약속을 안 지키는지 그럼 어떻게 할 건지 물어도 “상부의 지침이 없다”며 입을 닫곤 묵묵부답이다. 북한 체제의 경직성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일 수 있지만, 이런 태도가 의도와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못 믿을 나라 북한’ 이미지를 강화한다는 점은 지적해두고 싶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6일 공군 제1017군부대 전투비행사들의 비행훈련을 현지 지도했다고 조선중앙 TV가 17일 보도했다. 김 위원장 뒤편에 서 있는 건 수호이-25 전투기다. 연합뉴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6일 공군 제1017군부대 전투비행사들의 비행훈련을 현지 지도했다고 조선중앙 TV가 17일 보도했다. 김 위원장 뒤편에 서 있는 건 수호이-25 전투기다. 연합뉴스
민주국가에서 국민 여론의 향배가 정책 결정에 영향을 끼치는 건 당연하다. 여론의 신뢰와 지지를 얻지 못하는 정책은 제대로 추진되기도 어렵다. 대북정책도 마찬가지다. 남북 간 합의를 아무 설명이나 유감 표명도 없이 헌신짝 버리듯 하는 태도로는 우호적인 대북 여론을 기대하기 어렵다. 남한에서 남북 화해와 협력 정책의 입지도 좁힐 개연성이 크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왜 우리 정부는 북한의 약속 파기에 항의도 제대로 못 하느냐”는 비판이 단골 메뉴처럼 쏟아진다. 이런 비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는 남한 당국이 유화적인 대북정책을 힘있게 추진하길 기대하는 건 과욕에 가깝다. 일방적 약속 불이행이 사소한 문제로 보일 수도 있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 법이다.

북한이 북-미 관계가 삐걱거리면 남북관계에도 제동을 건 전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노무현 정부 임기 말인 2007년 10월에 가서야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것도, 이른바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 사건’이 2년 만에 어렵게 해결되고 북-미 관계의 장애물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북한의 ‘북-미 관계 우선’ 정책은 좌초했다. 방코델타아시아 문제 해결이 지체되면서 노무현 정부 말기에나 시동이 걸린 남북 간 교류·협력 사업은 곧바로 정권교체와 함께 없던 일이 됐다. 북한이 이런 전철을 밟을 이유가 있을까.

이젠 거꾸로 남북관계 발전에 적극 나서, 북-미 관계 개선의 추동력을 얻는 발상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물론 현 제재 국면에서 전면적인 남북관계 개선은 기대하기 어렵다. 북한이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가동을 원한다는 건 비밀이 아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유엔의 대북제재 틀을 넘어서는 일이다. 남한이 더 적극 나설 대목이 있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북핵 문제 진전 없이 의지만으로 될 문제는 아니다. 우선은 제재의 틀 안에서 추진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해나가면서 남북 교류와 협력의 폭을 넓혀가는 게 합리적인 접근으로 보인다. 그렇게 해서 남북관계와 북-미 관계가 서로 자극을 주고받으며 이끌어가는 선순환 구조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게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주 시정연설에서 “판문점 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이 철저히 이행되어…북남관계가 끊임없이 개선되어 나가길 절절히 바란다”고 밝힌 대목은 반갑다. 이제 필요한 건 말이 아니라 실천이다.

su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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