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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보는 것과 보이는 것 / 김찬호

등록 2019-04-26 17:50수정 2019-04-27 14:43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얼마 전 지방에서 열리는 강연에 초대받았는데 행선지를 혼동하여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다. 담당자가 보내준 문자메시지를 잘못 읽었다. ‘ㄱ행 버스를 타고 ㄴ에 내리시라’고 했는데, ㄱ에 하차한 것이다. 다행히 약간의 여유를 두고 도착했기에 서둘러 택시를 타고 가서 행사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당황한 가슴을 가라앉히느라 심호흡을 해야 했다. 스케줄을 왜 건성으로 확인했는지를 반성하면서.

인간의 지각(知覺) 시스템은 워낙 불완전해서 착시가 종종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디지털 미디어의 사용이 늘어나면서 오류가 빈발하는 듯하다. 정보의 과잉 탓이다. 매일 수십통 내지 수백통의 문자를 교환하고, 수시로 뉴스와 유튜브를 검색한다. 그러는 동안에 엄청난 양의 글자와 이미지가 두뇌에 입력된다. 과부하가 걸리면 아무래도 오작동이 일어나기 쉽다.

문제는 그런 비정상적인 상태가 좀처럼 자각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독일의 정신과 의사 미하엘 빈터호프가 쓴 <미성숙한 사람들의 사회>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정보의 포화를 알아차리는 기능이 없다. 정신 그 자체가 바로 나 자신인 만큼 다른 신체 부위처럼 객관화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식을 하면 위가 더부룩하고 심하면 쑤시기까지 하는 데 비해, 두뇌는 과로를 해도 근육통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는다. 진화 과정에서 지금과 같은 정보 폭주를 경험한 바가 없기에 경보 장치가 개발되지 않은 것이다.

정보의 과잉과 함께 매체 자체가 유발하는 문제도 있을 듯하다. 스크린에서 반짝이는 디지털 신호는 은연중에 마음을 들뜨게 한다. 그리고 무한한 하이퍼텍스트로 얽혀 있는 사이버 공간에서 분주하게 스크롤바를 내리며 이곳저곳 눈길 가는 대로 클릭을 하다 보면, 의식의 흐름이 툭툭 끊긴다. 피상적인 정보와 파편화된 자극들에 끌려다니느라 생각하는 힘이 쇠약해지는 것이다. 뇌리는 산만해지고 일상도 어수선해진다.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이라는 책에서 인간 지성의 핵심을 ‘본 것과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역량’으로 설파한다. ‘주의를 기울이다’를 영어에서는 ‘pay attention’이라고 표현한다. 주의력은 돈처럼 한정되어 있어서 의식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에너지다. 그런데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기보다는 빼앗기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행선지를 착각하는 정도의 실수는 사소한 것이다. 많은 안전사고가 결정적인 사항에 태만해서 벌어진다. 그 주의력 결핍의 이면에는 도덕적 해이와 구조적 부조리가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못 보거나 안 보는 것이 문제다. 일상에서도 분주하게 살다 보면 그렇게 되기 쉽다. 타인의 표정과 몸짓을 읽는 시력이 박약해지고, 말 또는 침묵의 속뜻을 놓친다. 한국인은 문해력이 매우 낮다고 하는데, 사람을 독해하는 능력도 그렇지 않을까.

보이는 것이 많아질수록 보는 것은 오히려 줄어든다. 시각 정보의 범람 속에서 시선의 주체가 되기 어려운 것이다. 찬찬히 살펴보고 요모조모 따져볼 수 있을 때, 정보를 조합하고 지식을 창조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인간관계에 정성을 기울이고 내면에도 충실해진다. 섣불리 단정하지 않고 애매한 것을 견디며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겸허하게 기다릴 줄 아는 경청의 공간이 열리는 것이다.

산책길에 야생화 한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습관적으로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대신 다가가서 들여다보았다. 마주하고 있으니 서서히 클로즈업된다. 풍경이 입체로 확장된다. 속도를 늦추면 투명해지는 렌즈, 표면으로 스쳐 지나오던 대상들의 깊이를 가늠하는 조리개, 그 마음의 근육을 꽃들이 일깨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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