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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페인트 눈물 / 은유

등록 2019-05-03 15:45수정 2019-05-03 19:08

은유
작가

고양이 무지는 아침마다 베란다 창틀로 뛰어오른다. 18층 꼭대기는 세상을 관찰하기 좋은 전망대다. 그런 고양이의 의젓한 뒤통수를 나는 책상에서 감상하곤 한다. 하루는 무지가 생소한 울음소리를 냈다. 옆동 옥상에서 먹잇감인 새를 봤을 때 내는 우렁찬 야생의 소리랑은 달랐다. 무슨 일인가 봤더니 아파트 난간에 사람이 있다. 24년 된 단지의 페인트칠이 시작된 거였다.

작업자는 밧줄에 매달려 페인트 스프레이를 빠른 손놀림으로 뿌려댔다. 방석만한 깔개에 엉덩이를 댄 그는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떠 있었다. 간당간당 흔들리는 사람을 보자 현기증이 났다. 건물 벽에 붙은 사람이 지상에서는 검은 덩어리로 보이는데 같은 층 높이에선 인체 형상이 온전히 드러났다. 나는 커튼을 닫았다. 무지는 꼼짝 않고는 간간히 요상한 소리를 냈다. 내게 묻는 듯했다. “날개도 없는 닝겐(인간)이 왜 저기에 매달려 있는 거야?”

나는 인터넷 창을 켜고 ‘아파트 외벽 작업’을 검색했다. 청주시 J(62)씨, B(35)씨, 의정부시 A(78)씨, 수원시 J(47)씨, 서울시 김모(55)씨, 광주시에 사는 한 50대 남성, 춘천시 인부 B씨, 수원의 러시아인 A(25)씨…. 아파트를 칠하다가 떨어져 사망한 이들이다. 설마 했는데 ‘전신 골절’이란 단어가 들어간 지역신문 단신은 끝도 없이 나왔다.

2년 전 양산시에서 일어난 사건은 나도 본 기억이 났다. 옥상에 설치해둔 밧줄을 주민이 커터칼로 절단해버려 숨진 인부 이야기. 김모(46)씨는 오전 8시쯤 음악을 틀고 일하던 중 수면에 방해된다며 음악을 끄라고 항의하는 주민에게 변을 당했다. 고인은 칠순 노모, 아내, 그리고 열일곱살부터 세살까지 5남매 등 일곱 식구의 가장이었다고 한다.

우리 아파트에서 작업하는 분들도 누군가의 자식이고 남편이고 아버지일까. 고층건물 외벽으로 출근하는 심정과 그런 가장을 바라보는 가족의 질긴 불안을 헤아려본다. 살다 보니 떠밀려간 자리가,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아파트 난간 같은 ‘벼랑 끝’일 순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생과 사의 완충지대가 10센티미터도 확보되지 않는 일자리는 있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살기 위해 일하지만 일하다가 죽도록 내버려두는 이 부조리한 구조는 너무 노골적이라 가려져 있다.

우리 아파트는 화사한 봄옷을 갈아입었다. 다행히 사고는 없었으나 그 며칠간 무지는 매일 외부의 낯선 소리와 냄새와 움직임에 반응하며 ‘저기를 보라’ 명령했다. 나는 고양이를 따라 응시했다. 외벽 작업을 하는 반나절만이라도 땅 위에다 매트리스 같은 안전장치를 깔아놓으면 좋겠다 싶다. 당사자는 덜 불안하고 존중감이 들도록. 주민들은 그를 운 나쁘면 죽기도 하는 도구적 인간이 아니라 어떤 경우라도 살아야 하는 존엄한 존재로 보도록. 그러면 적어도 벽에 붙은 벌레 털어내듯 사람을 떨궈내는 일은 막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런 내 안전 구상을 이웃 아주머니에게 말했더니 실현 가능성 없다며 흘려버린다. 사고가 줄지 않는 걸로 봐서 도장 업체 대표나 노동자의 안전을 담당하는 관료들은 무신경하다. 아들 용균의 죽음으로 세상 돌아가는 비밀을 알아버린 김미숙씨는 이렇게 한탄했다. “우리나라는 안전장치를 하는 것보다 목숨값이 쌉니다.”

고양이에게 면목 없는 인간 세상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날개도 없이 허공에 매달려 일할 것이다. 그들은 존 버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들”이다. 죽어도 죽지 않는 이들이 흘린 ‘페인트 눈물’로 우린 깨끗한 아파트, 쾌적한 도시에 산다. 인간 불평등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새가 있을 자리에 사람이 있어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면서.

※ ‘페인트 눈물’은 30년 경력의 도장 노동자가 “작업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면 눈에서 페인트 눈물이 나온다”고 말한 데서 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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