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논설위원
햇볕은 따가워도 바닷바람 덕에 서울의 무더위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지난 4일 부산 영도구 ‘깡깡이마을 유람선’에 올랐다. 자갈치시장과 영도대교가 눈앞에 보이는 영도의 관문, 원양어업 붐이 일던 1970~80년대엔 수리조선산업의 메카였던 대평동은 최근 ‘문화적 도시재생’으로 조금씩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마을 여성들이 수리할 배에 매달려 조개껍데기나 녹을 벗겨내기 위해 망치질을 하던 소리에서 ‘깡깡이마을’이란 별칭이 붙었다.
고 최민식 사진작가가 렌즈에 담았던 깡깡이아지매들의 모습. 깡깡이마을박물관 입구에 걸려있다.
뭍으로 이동하는 ‘도선’의 노선이 3개나 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수리조선업 불황과 빈집 증가, 고령화가 겹치며 10년 전 도선은 끊겼다. 파출소, 병원, 약국 하나 없게 된 이 마을엔 주민 4분의 1 이상이 65살 이상 노인들이다. ‘유람선’ 형태이긴 하나 공식 허가가 떨어진 뒤 첫 운항에 나선 이날, 10년 만의 ‘도선 부활’이 반가운듯 몇몇 주민은 일부러 배에 올라탔다. “저게 선망이야. ‘겐짜꾸’라 불렀어. 여기서 고등어가 각지로 갔지. 그 옆은 오징어 잡는 트롤이고.” 마을 해설사인 80대의 김성호 어르신은 하나씩 배를 가리켰다. 진양상회 김재규 사장님은 “좀더 자갈치 쪽에 가깝게 돌아야 사람들이 뭐냐고 궁금해할텐데. 시간도 늘리고”라며 안타까운 듯 훈수를 뒀다. 운영은 마을기업이 맡는다. 1년간 운항허가를 놓고 관과 줄다리기를 벌이며 주민들의 결속력은 높아졌다. 17일엔 출항식과 마을잔치도 연다.
2013년 도시재생법 제정 이래 각 지방자치단체 사이 ‘도시재생’은 거대한 유행어가 됐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뉴딜’이란 이름으로 판이 더 커졌다. ‘보존’과 ‘주민 주도’를 강조하는 개념은 반가워도 ‘결국 ‘도시개발’의 간판 바꾸기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늘 들었다. 실제 적잖은 지자체가 대형 거점센터를 짓는 일로 지원비와 기간 대부분을 쓰고 지속엔 관심이 없다. 주민들이 감당 못할 변화의 속도는 곳곳에 젠트리피케이션과 오버투어리즘 문제를 가져왔다.
깡깡이마을은 이에 비하면 독특한 사례다. 이곳의 역사와 산업에 먼저 주목한 부산 지역 문화기획자들의 협동조합이 2015년 시에 제안해 3년짜리 35억원 지원을 따낸 이래, 주민들과 협업 체계를 꾸려 지금까지 사업을 펼치고 있다. 1912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조선소가 들어섰던 마을엔 아직도 8곳의 소규모 수리조선소와 260여곳의 선박부품업체가 돌아간다. 마을 공동재산을 운영하는 마을회도 살아 있다.
지금은 마을박물관, 공작소, 선박체험관 같은 거점공간이 만들어졌지만 이들이 먼저 착수한 건 마을의 생활·역사 등을 조사해 책 5권을 내고 주민들과 다양한 동아리를 꾸려 신뢰를 쌓는 일이었다. 국내외 예술가들도 항구와 근대시설, 현재의 산업이 결합된 흥미로운 콘셉트에 실비 수준의 비용을 받고 선뜻 초대에 응했다. 가수 최백호가 만든 노래 ‘1950 대평동’은 정만영 작가의 설치작품에서 흘러나오고, 70살 늙은 나무는 신명덕 작가의 작품으로 원형이 살아났다. 작가들은 주민품평회도 거친다. 이승욱 총감독은 “한때 전국 마을에 벽화가 유행했는데 훼손 이야기가 나오는 건 주민들의 무관심 때문이다. 그 지역의 장소성·역사성을 드러내며 주민들 삶과 분리되지 않는 보존적 재생을 위해선 문화적 비판과 성찰이 필수라 여겼다”고 말했다.
부산 영도구 깡깡이마을(대평동)에서 가장 지저분했던 구역은 쌈지공원으로 변신했다.
쌈지공원에 얽힌 에피소드는 인상적이다. 마을정원사 동아리가 가장 지저분했던 폐가 주변을 공원으로 꾸미고 브라질 작가 제 팔리토가 벽화를 그리자, 어느날 옆집 주인이 자신의 집에 직접 페인트를 칠했다. 그 옆집은 지붕을 단장하고 예쁜 창문을 냈다. “두분 다 똑같은 말을 하더라. 우리 집이 제일 지저분해 민폐가 되는 것 같다고.” 이웃들은 꽃을 심고 화분을 내놨다. ‘우리 동네 뭐 볼 게 있어, 싹 밀어내야지’라던 주민들도 조금씩 시선이 달라졌다. 공공예술을 ‘사진찍기용’ ‘장식용’ 정도로 바라보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많지만, 문화는 이렇게 사람들 사이 ‘공공적 감수성’을 심는다.
물론 쉽지 않다. 사업 내용을 두고 주민 간에 갈등도 있다. ‘볼거리 작품’을 더 채우라거나 ‘단시간 내 자립’을 재촉하는 공무원들과 맞서기도 해야 한다. 분명한 건 최소 10년은 바라보는 지원과 진득이 지켜보는 인내심, 집중적으로 주민들과 결합할 전문인력 없이 원도심 재생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마을 토박이인 박기영 마을회 총무는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따 마을카페를 지키고 있다. 그는 “재생사업 뒤 인구가 많이 늘었냐고들 묻던데, 그건 아니다. 그래도 떠나던 마을에 사람들이 찾아와 이렇게 커피 한잔 대접할 수 있는 게 가장 좋다”며 웃었다. 오랜 세월, 대규모 재개발과 철거는 공동체와 개인의 삶을 급속하게 해체해왔다. 그게 행복하냐고 깡깡이마을은 묻고 있다.
dora@hani.co.kr
깡깡이마을 유람선(왼쪽)과 신기한 선박체험관. 예인선을 활용한 선박체험관엔 다양한 예술가들의 상상이 더해져있다.
깡깡이마을 대동대교맨션 벽에 그려진 '우리 모두의 어머니'는 이 마을 랜드마크 같은 작품이다. 깡깡이아지매의 모습을 형상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