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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공중에 살짝 떠 있는 전화 / 이명석

등록 2019-05-17 16:59수정 2019-05-17 22:45

이명석
문화비평가

서울역 근처의 카페, 창밖으로 빛바랜 공중전화 부스가 보인다. 한국의 스마트폰 보급률이 95%라니 벽촌의 노인이나 극단적인 자연인을 제외하면 하나씩 품고 있는 셈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휴대전화를 잊어버리지 않은 다음에야 공중전화를 쓸 일이 없다. 나 역시 기본요금이 얼마인지 잊어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이 동네에선 전화박스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제법 볼 수 있다. 그들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 걸까? 이제 퀴즈를 풀어보자.

커다란 배낭을 멘 남녀가 공중전화 부스 앞에 배낭을 내려놓는다. 여자가 전화기 앞에 서서 작은 노트를 꺼낸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남자에게 말한다. 남자는 편의점으로 달려간다. 자 어떤 상황일까? 나의 추리는 이렇다. 두 외국인 여행자는 인천공항에서 공항철도로 서울역까지 왔다. 인터넷 검색을 해서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는데, 근처에 오면 전화를 걸어 자세한 위치를 물어보라고 들었다. 둘은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지만 로밍 비용이 부담스러웠다. “서울은 웬만하면 와이파이가 터진대.” 그래서 공중전화를 이용하려 했는데, 환전하면서 동전을 바꾸지 못한 모양이다. 나의 추리는 틀렸다. 여자는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 전화를 걸고, 남자는 생수를 사서 돌아온다. 아마도 공항철도를 탈 때 동전이 생겼나 보다.

여행자들이 떠난 뒤, 남루한 행색의 남자가 전화박스 안을 흘깃 들여다본다. 전화기 아래를 더듬는 것 같더니, 수화기가 위에 올려져 있는 걸 본다.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누른다. 잠시 뒤 아무 말도 없이 수화기를 내려 전화를 끊는다. 그는 누구이며 무얼 한 걸까? 그는 아마도 동자동 주변의 쪽방촌에 살고 있을 것이다. 공중전화 반환구에서 가끔 버려진 동전을 챙겼나 보다. 그러다 오늘은 전화기에 동전이 남아 있다는 숫자를 봤다. 오랫동안 연락 못 한 가족 생각이 났다. 번호를 눌렀다. 받았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끊었다.

이쯤 되니 행인 중에 공중전화를 쓸 사람을 맞혀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다. 그때 군복을 입은 두 청년이 횡단보도를 건너온다. 전방에서 휴가를 나와 일단 서울역에 왔는데 바로 고향으로 내려가긴 아쉬웠나 보다. 서울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보자. 나의 예상대로 두 사람은 공중전화 부스 안에 들어간다. 그리고 윗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는 줄 알았더니 스마트폰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 군부대 안에서도 휴대전화를 쓸 수 있다지.

해가 진 뒤 집으로 돌아오는데, 평소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공중전화들에 눈이 간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밤늦게 성균관대 근처를 지나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져 공중전화 부스로 몸을 피한 적이 있다. 잠시 뒤 식당 종업원 복장의 젊은 여성이 옆 칸에 뛰어들어왔다. 전화기를 들고 한참을 재잘재잘대더니, 갑자기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었을까? 그곳엔 외국 유학생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타향에서 공부하랴 일하랴 생긴 서러운 마음을 국제전화 선불카드에 기대 털어놓고 있었을까?

옛날의 공중전화는 하늘에 살짝 떠 있었고, 사람들은 긴 줄을 지어 매달렸다. 그 줄을 놓치면 누군가와 목소리를 주고받을 방법이 없었다. 지금의 공중전화는 나의 발아래, 한참이나 밑에 있다. 남은 인생에 단 한 번도 쓸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다 내가 발을 헛디딘다면, 거기 반드시 있어 주어야 한다. 중요한 약속을 가는데 스마트폰을 잃어버렸을 때, 케이티(KT) 통신구에 화재가 나서 휴대전화와 인터넷이 먹통이 될 때, 요금 연체가 이어져 더 이상 서비스가 안 된다고 할 때…. 그리고 기억하자. 지금도 누군가는 거기 발을 올리고 겨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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