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사와 상원사를 잇는 오대산 옛길은 전나무, 소나무, 참나무 등으로 숲이 우거져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오월의 끝자락, 신록이 눈부시다. 수건으로 툭툭 털어냈는데도 머리카락에 끈적임이 남았다. 비가 그친 야트막한 산길로 긴 산책을 다녀왔다. 바람 한점 가벼운 고요한 숲, 나뭇잎에 매달려 있던 굵은 물방울이 후두두 떨어지는 숲길을 발소리 죽이며 걸었다. 온갖 식물의 향과 흙냄새가 뒤엉켜 요동을 친다. 깨끗한 햇빛은 그것이 건드리는 모든 것들을 찬란하게 만든다. 이파리들의 뼈와 연한 물안개와 무엇인가를 새기면서 구르며 흘러가는 시간까지.
애기똥풀과 별꽃과 하얀 산제비꽃이 곳곳에 숨어 폈다. 투명한 작은 물방울을 꽃잎에 이고 큰 나무 그늘 속에서 또르르 꽃잎을 말고 있다. 올해 나온 찔레꽃 새순이 한달음으로 솟았다. 고사리는 더욱 자랐다. 어린 시절 씹어 먹던 쌉싸래한 맛이 생각나서 찔레 순을 질근질근 씹으며 걸었다. 젊은 부부가 아이 손을 잡고 걷는다. 깡충거리는 아이의 재잘거림이 숲의 노래가 된다.
얼핏 고요한 숲도 속내를 보면 투쟁의 현장이다. 나무와 풀들이 끊임없이 세력을 다투며 살아간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숲은 균형 속에서 공존한다. 생존을 위한 투쟁은 난폭하지만 끝내는 조화를 이루며 산다. 투쟁 속에서 평화를 만드는 방법을 안다. 평화 속에서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유지되는 평화다.
모든 나무는 저마다의 몸 빛깔과 제 세월의 리듬을 가지고 있다. 3월부터 성급하게 잎을 틔워낸 잡목들은 벌써 수풀로 우거졌지만, 느티나무와 메타세쿼이아 잎의 기세는 이제 시작이고, 게으른 대추나무는 이제야 싹을 틔우며 살아 있음을 전한다. 그러나 한여름이 오면 ‘조금 빨리’와 ‘조금 늦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묵직한 발걸음의 저 큰 나무들을 다그치면서 잎을 빨리 피우라고 거름과 물과 햇빛을 몰아준다면 어찌 될까? 저 의연하고 너른 품이 나올까?
자연도 사람도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리듬을 가지고 태어난다. 큰 병이 없는 한, 아주 척박해서 고사할 위험이 없는 한, 그냥 묵묵히 성장과 자람을 지켜보며 토닥토닥 사랑해주면 된다. 손을 대서 아름다워지는 것이 있고, 손을 타서 죽어가는 것도 많다. 아이를 잘 키우는 일도 결국은 손을 대야 하는 것과 손을 타는 것의 경계를 아는 일이다. 세상이 돌아가고 아이를 키우는 이치가 다 자연의 법칙에서 나온다. 자연도 아이도 사랑의 눈빛이 찬찬해야 아름다운 속내가 보인다. 그래서 자연은 우리가 늘 배워야 할 삶과 교육의 은유이다.
초등학교 교사로 살던 시절, 눈비가 내려도 매일 아침 아이들과 함께 숲에 다녀온 후 차 한잔 나누며 하루를 열었다. 아이들의 감각과 언어는 숲에서 더욱 눈이 부셨다. 숲의 미세한 변화를 그냥 몸으로 알아챘다. 숲을 향해 뻗어대는 더듬이에 약간의 자극만 가하면 온몸으로 숲을 보듬었다. 싱싱한 에스프리가 쏟아져 나왔다. 바람 속에서 맡은 계절의 향기를 말하고, 햇빛에 뒤척이는 새들의 수런거림을 이야기로 지어냈다. 몸의 감각이 생생하게 열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힘이 좋은 아이들은 대부분 참 잘 크는 것을 지켜봤다. 반대로 어딘가 아픈 아이들은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향한 감각이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한참을 숲과 어울린 이후에야 배시시 웃음을 찾았다.
평화로운 공존을 찾지 못하는 도시와 어른들의 불협화음 반대편에 오월의 숲과 아이들이 있다. 이들은 완전체 트리오다. 저절로 조율된 협화음의 솔페지오다. 남한산초등학교를 비롯해 교육의 뜻을 깊이 새기는 혁신학교들이 숲과 자연과 노작을 교과서로 삼는 이유다. 모든 어른과 교사는 아이들을 자꾸자꾸 건물 밖으로, 숲으로, 자연으로 데려가야 할 의무가 있다.
“나는 걸을 때만 사유에 잠긴다. 걸음이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루소의 말이다. 아직 내 몸에 숲의 향이 남았다.
안순억
경기도교육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