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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안순억의 학교 이데아] 특권에 분노하며 특권을 좇는

등록 2020-01-05 19:26수정 2020-01-06 09:25

안순억 ㅣ 경기도교육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같은 나라가 아니에요. 아이들도 학부모도 너무 다릅니다.”

분당에서만 십수년 있다 경기도 외곽 학교로 발령받은 교사가 건넨 말이다. 현저히 부족한 학습능력, 욕설을 달고 사는 아이들, 팍팍한 살림살이에 자녀 교육은 뒷전인 학부모에 이르기까지 극명하게 학교 모습을 대비시킨다. 출신과 지역에 따른 온갖 격차가 그 어느 때보다 ‘역대급’이라고 교사들은 입을 모은다.

더 좋은 학군을 찾아 이삿짐을 싸는 ‘교육 난민’의 대장정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때다. 학구와 학교가 이미 특권을 예비한다. 학령인구가 급감하지만 인기 좋은 학군의 교실은 과밀로 몸살을 앓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특권의 자리는 ‘이미 정해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확률이 더 높다.

학생 1인당 책정된 예산 8만달러에 연간 학비가 4만달러인 부유층 자녀들만의 사립학교인 미국의 세인트폴 고등학교 이야기를 담은 <특권>(셰이머스 라만 칸 씀)은 의미심장한 사회학적 통찰이다. 이 학교 학생들은 폐쇄적인 특권 자원을 활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과 능력으로 스스로 사다리에 오르도록 교육받는다. 학습능력뿐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획득한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자질을 갖춘 이들 대다수는 최상위 대학에 진학하고 공정한 과정을 거쳐 높은 신분과 지위를 확보한다.

특권의 대물림은 우리도 다를 바 없지만, 과정이 더 원시적이고 결과로 인한 상처는 승자와 패자를 가리지 않는다. 서울대 입학본부가 펴낸 연구보고서에서 어느 교수는 특목고 출신 서울대 학부생들의 특징을 ‘구별’과 ‘소속’에 집착하는 경향성에서 찾는다. 우월감이 강한 이들은 고학년이 될수록 일반고 출신과 차별성이 줄어드는 것을 불안해하면서 그 해결책을 로스쿨이나 외국유학 등 이들과 구별되는 ‘소속’에서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서울대 ‘과잠바’에 출신 특목고 교명을 새겨 넣는 형태로 우월감을 과시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일반고 출신 학생들의 심리적 위축감도 들춰낸다. 실제로는 특목고 학생들에 비해 실력과 소양이 부족한 경우는 거의 없음에도 열등감으로 인한 소극성 때문에 계속해서 기회를 잃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상류층의 문화자본을 장착하고 성장해온 누군가에게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지만 매번 필생의 노력으로 ‘소속’을 쟁취해온 이들에게는 많은 것이 ‘넘사벽’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구별짓기와 그 안에서의 따라잡기를 거듭하며 확보한 이들 엘리트의 성취는 당당히 얻은 자기 것이며, 그 결과로 다른 계층에 대한 차별의 시선은 날카로워진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새로운 불평등 구조는 토크빌이 말한 것처럼 장벽을 없앴다기보다 그 모양을 바꾸었다. 기회의 평등이 결과의 평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철학자와 거리의 평범한 짐꾼 간의 차이는 천성이 아니라 습관과 풍속과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애덤 스미스의 말이 더욱 의미심장해졌다.

특권과 반칙은 다른 개념이다. 국회의원 면책특권처럼 신분과 지위에 따라 부여하는 특별한 권리도 필요하다. 지위를 얻는 과정의 정의, 특권을 사용하는 목적의 공공성, 그리고 이들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관건이다. 불평등은 그 자체보다 분노가 더 무섭다. 그 분노는 모멸과 불신을 먹고 괴물이 되어, 신학기 교육 난민과 같은 배타적 특권세계로의 진입을 위한 대장정을 부추긴다. 불평등을 양산하는 제도의 개혁 못지않게 엘리트가 갖춰야 할 자질을 요구하고 가르쳐야 할 때다. 차별을 배격하고 통합의 정의를 실현하는 유능한 엘리트도 대거 등장해야 한다. 언제까지 모든 특권에 분노하면서 공정에 대한 이 지루한 논쟁만을 반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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