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엄마 아빠가 대화하자고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편하게 말하라고 하시는데 별로 할 말도 없고 앉아 있는 게 힘들어요.” 글쓰기 수업에서 스무살 학인이 말했다. 대화는 관계의 윤활유라고 아는 난 혼란스러웠다. 알고 보니 부모가 운동권 출신이란다. 어릴 때부터 지속된 소통형 참교육에 피로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럴 수 있다. 자식이 보기에 부모는 돈, 힘, 지식을 다 가진 강자다. 자식의 생살여탈권, 적어도 용돈권을 쥐고 있다. 그런 비대칭적 관계에서 약자는 발언의 수위를 검열하거나 잠자코 들어야 하는 정서 노동을 피하기 어렵다. 대화가 배운 부모의 좋은 부모 코스프레가 되고 마는 것이다. 실은 나도 ‘이만하면 좋은 부모’의 함정에 빠져 있었다.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자 서로 바빠서 대화는커녕 대면 기회가 줄었다.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아이와 밀착하지 않으니까 집착도 덜어졌다. 내가 육아서에 나오는 모범 엄마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식을 통제하는 극성 엄마도 아니란 은근한 자부심마저 들었다. 한번은 슬쩍 물었다. “엄마 정도면 괜찮지? 잔소리도 잘 안 하고?” 아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엄마도 짬짬이 잔소리 많이 해요.” 역시, 자기 객관화는 실패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폐회로텔레비전(CCTV)처럼 나를 가장 가까이 지켜보는 타인, 자식이 참스승이다. 그 후로 아이에게 말할 때마다 조심스러웠다. 이것은 대화인가 훈계인가, 무관심인가 무리수인가. 경계는 늘 알쏭달쏭했다. 매번 질문하고 검토하는 수밖에. 애써보다가도 내 기분이 엉망인 날은 슬그머니 짜증이 일었다. 내가 자식한테도 눈치 보고 쩔쩔매야 되나, 라며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내적 외침을 삼키곤 했다. 원래 인간관계는 공손이 기본이다. 그런데 부모라는 이유로 자식한테는 막 해도 된다고 여기는 지극히 폭력적인 양육 관습을 나도 모르게 체화하고 있었다. 인문학으로 본 체벌 이야기를 다룬 책 <사랑해서 때린다는 말>을 읽고선 난 괜찮은 부모라는 환상을 벗었다. 자식에게 매를 드는 체벌만 폭력이 아니다. 빈정거림이나 비하 발언도 언어폭력, 방문을 쾅 닫거나 설거지를 할 때 탕탕거리며 불안감을 조성하는 건 정서 폭력, ‘나중에 두고 보자’는 말은 예고 폭력 등등 찔리는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얼마 전 정부가 부모(친권자)의 자녀 체벌을 제재하는 방향으로 민법 개정을 검토한다는 기사가 났다. 댓글 여론은 험했다. 보기에도 아까운 자식이지만 사람 만들려면 체벌은 필요하다거나, 교사의 손발을 묶더니 부모의 손도 묶는다고 개탄하는 의견, 내 아이니까 꿀밤 정도는 된다는 주장도 폈다. 이들은 꿀밤은 애정 표현이고 체벌은 폭력이 아니며 불가피한 부모 노릇이라는 믿음을 가진 듯 보였다. ‘사랑의 매’라는 말은 그 자체가 이중 폭력이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고 폭력을 정당화한다. 우리는 대부분 최초의 폭력을 가정에서 경험한다. 그간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수많은 어른들은 집과 학교에서 겪은 폭력의 기억을 수십년이 지났어도 그대로 복기했다. 맞아서 사람 됐다는 증언은 어디에도 없다. ‘사랑의 매’는 때리는 사람의 언어이지 맞는 사람의 언어는 아닌 것이다. ‘미성년’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좋은 어른이, 부모가 되긴 어렵다. 자식에 대한 성실한 이해는 귀찮고, 빠른 복종을 받아내길 원하는 이들이 ‘사랑의 매’라는 죽은 문자를 신봉하는 게 아닐까. 아이들은 대화와 훈계의 차이를 특유의 예민함으로 걸러내고 체벌과 훈육의 노골적인 차이를 간파한다. 가족이든 학교든 회사든, 그 조직의 가장 약자는 많은 진실을 알고 있다. 묻지 않으니 말을 안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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