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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책방 ‘풀무질’ 살리기 (2) / 전범선

등록 2019-06-07 17:42수정 2019-06-07 22:13

전범선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책방 풀무질 인수를 마쳤다. 어젯밤(7일) 은종복 대표님 환송식을 조촐하게 했고, 다음주부터 내부 공사에 들어간다. 기존 부채는 은종복 대표님의 희생과 천명 가까운 여러 분의 후원으로 거의 해결했다. 일부는 나와 동료들이 넘겨받았다. 7월 중순 재개업 예정이다. 서른세살 책방 풀무질은 폐업 위기를 넘겼다.

아직 살았다고 할 수는 없다. 풀무질에 다시 청년들이 들끓어야 한다. 동네 책방이 망하는 데는 구조적인 원인이 크다. 대형 서점과 가격 경쟁이 안된다. 완전도서정가제를 하루빨리 실시해야 한다. 그러나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풀무질도 ‘판올림’이 필요하다. 오늘날 인문사회과학 서점의 역할은 무엇일까.

‘풀무질’이란 대장간에 불을 지피기 위해 풀무로 바람을 일으키는 행위다. 성균관대 학회지 이름이었던 것이 책방 이름이 되었다. 책으로 마음을 뜨겁게 하고, 그것이 모여 혁명의 횃불이 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다. 1986년 풀무질이 처음 생겼을 때, 그 비유는 너무나도 자명했다. 광주 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지른 군부 독재 정권이 있었다. 진실 앞에 분노해야 했고,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한 이론으로 무장해야 했으며, 여럿이 뭉쳐 행동해야 했다. 그만큼 책방의 의의도 분명했다. 책 한권 한권을 땔감 삼아 거센 불길을 일으키는 곳이었다.

풀무질에 처음 드나들던 86세대는 결국 87년 체제를 만들었고, 김대중과 노무현을 탄생시켰으며, 촛불혁명으로 재집권했다. 한 세대를 주로 삼십년으로 보는데, 86세대가 학생에서 기득권으로 거듭난 지난 삼십년 동안 대한민국도 많이 변했다. 정치 민주화는 어느 정도 달성했다. 은종복 대표님은 책 좀 팔았다고 97년 국가보안법으로 끌려갔는데, 나는 그럴 걱정은 없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조금씩 자리잡고 있다.

반면 경제 민주화는 요원하다. 평화통일도 미완이다. 민족해방, 민중해방, 노동해방을 위한 풀무질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나아가 밀레니얼 세대는 더 다양한 목소리를 낸다. 여성해방, 성소수자해방, 동물해방을 외친다. 과거에는 모든 압제의 주체이자 투쟁의 대상이 독재 정권으로 환원되었다면, 지금은 가부장제부터 공장식 축산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담론은 분산되었고, 정체성은 세분화되었다. 이제는 엔엘(NL)이냐 피디(PD)냐의 문제가 아니라, 비건이냐 페미니스트이냐, 비건 페미니스트이냐 에코 페미니스트이냐,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이냐 퀴어이냐 등의 문제다. 세상은 많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바꿀 것은 많다.

변화의 기저에는 여전히 책이 있다. 아무리 영상매체가 발달하고 사회관계망 서비스를 통한 교류가 활발해도, 가장 근본적인 연구와 심도 있는 대화는 책으로 이뤄진다. 마르크스를 유튜브로 만날 수도 있고, 보부아르를 트위터로 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책으로 읽는 것이 제일 직접적이고 강렬하다. 지금도 세계 변혁을 이끄는 사람들은 책을 읽고, 책을 쓰고, 서로의 책을 논한다.

“책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대전제는 유효하다. 책이 사회 진보의 매개체로 남아 있는 한, 책방 풀무질의 존재 이유도 충분하다. 다만 86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꿈꾸는 세상이 어떻게 비슷하고 어떻게 다른지 고민해야 한다. 비슷한 만큼 예전 풀무질의 모습도 유지될 것이고 다른 만큼 바뀔 것이다. 차근차근 가려 나가야 할 작업이다.

반드시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 은종복 대표님은 입버릇처럼 당신의 두가지 꿈을 이야기했다. “온 세상 아이들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고,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 되는 세상.” 그 세상이 올 때까지 책방 풀무질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 나의 몫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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