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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야단, 치고 맞기의 적정기술 / 이명석

등록 2019-06-14 17:20수정 2019-06-14 23:42

이명석
문화비평가

공원 화장실에서 고함과 울음소리가 뒤섞여 나온다. 엄마가 까랑까랑 야단을 치니 아이가 또랑또랑 대든다. 둘 다 기세도 좋고 목청도 타고났다. 화장실이 공명 좋은 스피커 역할을 해서, 멀리서도 둘의 말이 또렷이 들린다. 아마도 아이가 친구들과 소풍을 오며 직접 도시락을 준비했나 보다. 그런데 도시락을 못 가져온 애가 있어 자기 몫을 나눠줘야 했다. 아이는 싫다며 울기 시작했고, 엄마는 화장실로 데려와 야단을 쳤다. 아이는 서운하고 억울하다. 결국은 화장실을 뛰쳐나오며 외친다. “엄마도 내 마음 알잖아!”

내가 자라난 시장에선 닭 잡는 소리만큼 애 잡는 소리가 흔했다. 보통 해질녘에 엄마들의 고함 소리가 먼저 들렸다. “너는 숙제도 안 하고 놀러 나가더니, 밥때가 되어도 안 들어와?” 애들은 이 핑계 저 핑계 뱉어내다, 결국 사이렌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면 아빠들이 쩌렁쩌렁한 소리로 푸닥거리에 나섰다. 이렇게 야단을 치면 애들 버릇을 고칠 수 있을까? 나의 경우엔 일시적으로는 성공이었다. ‘야단맞지 말자.’ 이게 내 모든 행동의 기준이 되었다.

그렇다고 어른들의 말에 순종하는 아이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어른들은 한번 야단을 치기 시작하면, 아이들이 아무리 해명하려 해도 들어주지 않는다. 설사 내 잘못이 아니었다는 게 밝혀져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다른 꼬투리를 잡아내 더 야단친다. 그리고 즐겨 이 카드를 꺼낸다. “어디 꼬박꼬박 말대꾸야?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아이는 입을 꼭 닫았다. 내 마음을 이해받지 못할 게 뻔하니, 어설프게 내비치지 말자.

집 밖에서도 부당한 야단은 일상이었다. 학교에선 선생, 군대에선 고참, 직장에선 상사, 프리랜서가 되니 갑이 나섰다. 다행히 내겐 일찍부터 발달시킨 기능이 있었다. 떠들 테면 떠드세요. 왼쪽 귀가 들은 말은 오른쪽 귀로 하이패스! 하지만 시큰둥한 표정이 더욱 화를 돋우기도 했다. 그럴 때 선배들은 말했다. “너도 야단칠 입장이 되면 이해할 거야.”

예언은 적중했다. 잡지의 편집장을 맡았는데, 신입기자가 11시가 다 되어서야 출근하는 거다. 최대한 너그러운 어조로 10시까지는 출근하면 좋겠다고 했다. 기자가 되물었다. “그때 와 봤자 인터넷 돌아다니고 그러면 점심 먹을 땐데 무슨 차이인지?” 내가 직장 생활을 포기한 데는 야단을 못 친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나 말고도 주변에는 야단을 못 치는 야단치(惹端癡)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아이를 가지면 특히 힘들어한다. 분명히 잘못된 일은 꾸짖어야 하는데, 자신이 어릴 때 부당하게 야단맞은 기억 때문에 싫은 소리를 못 하겠다는 거다. 집에서는 대충 넘어가고 져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예의 없이 굴 때는 따끔하게 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이는 이런 급격한 온도 차이에 놀란다. “왜 엄마아빠는 남들 앞에서 나를 구박하지 못해 난리야?”

누구든 야단맞을 짓을 한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면 잘못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러면 누군가 야단을 쳐줘야 한다. 따끔하지만 억울하지 않게. 그런데 어렵다. 야단을 치는, 야단을 맞는 적정기술은 어디에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공원을 내려가니, 어느새 주변이 평온해졌다. 나무 탁자 위에 빈 도시락이 모여 있고, 그 옆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선 엄마들끼리 수다를 떤다. 아이는 다른 아이에게, 엄마는 다른 엄마에게 위로받고 있을까? “울지 말고 내 거 먹어.” “아휴, 혼낼 땐 제대로 혼내줘야죠.” 야단을 피할 수 없다면 푸념할 상대라도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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