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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더위를 다스리는 사회 / 김찬호

등록 2019-06-21 18:14수정 2019-06-21 23:34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천국과 지옥>은 어린아이의 유괴 사건을 둘러싸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검거된 범인이 조사 과정에서 밝힌 동기는 단순했다. 궁색한 집에서 더위에 시달리다가 에어컨을 켜고 사는 언덕 위의 부잣집에 대한 원망이 일어나 범행한 것이다. 불쾌지수가 높아지면 공격성이 늘어난다. 한국의 범죄 통계를 봐도 7~8월에 가장 높게 나타난다. 더위는 생활 안전의 변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사정은 어떤가.

이제 웬만한 공공장소의 실내 공간에는 에어컨이 잘 갖춰져 있지만, 사적 공간에서는 냉방의 빈부차가 크다. 온열 질환 사망자는 저소득층이 20% 정도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외국도 비슷하다. 1995년 일주일 동안 7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시카고의 폭염 사태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에릭 클라이넨버그의 <폭염사회>에 따르면, 폭염 사망자의 분포를 지도로 작성하고 보니 인종차별 및 불평등의 지형도와 대부분 일치했다. 열악한 주거시설 때문만이 아니다. 산업이 붕괴해 지역이 황폐해지고 범죄가 늘면서 집 안에서만 갇혀 지내다가 변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자연재해가 사회·경제적 구조에 의해서 증폭된 것이다.

무더위는 신체를 매개로 가난한 사람들의 고립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영화 <기생충>은 부자와 빈자를 격리시키는 후각 코드에 모티브를 두고 있다. 주인공 가족은 신분과 외모를 완벽하게 세탁하여 부유한 집에 위장 취업하지만, 가난의 냄새만큼은 제거하지 못한다. 햇빛과 바람이 들지 않는 반지하의 음습한 공간에 살면서 몸에 배어버린 악취로 인해 혐오와 경멸의 대상이 된다. 현실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그런 상황은 날씨가 더울수록 더 쉽게 벌어진다. 영화의 배경도 여름이다.

부자와 빈자 사이만 단절되는 것이 아니다. 더위가 심하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귀찮게만 느껴진다. 고 신영복 선생은 감옥의 경험을 생생하게 전해준 바 있다. 감방에서는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견디는 겨울과 달리 여름에는 상대방을 증오하게 된다는 것, 아무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그냥 존재 자체로 인해 서로를 미워하면서 동시에 자기혐오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비좁은 공간에 따닥따닥 붙어사는 애옥살이에서도 비슷한 곤경에 빠질 수 있다. 타인뿐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서도 짜증이 올라오는 것이다.

이렇듯 더위는 건강뿐 아니라 자존감에도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 다행히 여러 가지 폭염 대책이 마련되고 있다. 서울시는 빈곤층 10만가구한테 전기료 혜택을 주고, 경기도에서는 독거 어르신들에게 냉방기까지 보급한다. 에너지 빈곤층을 줄이려는 이런 정책은 한정된 전기 자원의 소비를 면밀하게 재조정하는 작업과 병행될 수밖에 없다. 전철이나 도서관 같은 공공장소 그리고 대형 마트 등에서 적정 온도를 정해서 준수해야 한다.

에너지 공급만이 전부가 아니다. 일상의 얼개를 리모델링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효과적인 연결망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일부 공공건물을 쉼터로 개방하는 정책이 널리 실시되는데, 단순한 피신을 넘어 교류를 촉진하면 더 좋겠다. 미국 시카고의 경우에도 이웃관계가 살아 있는 빈민가에서는 폭염 사망자가 아주 적었다. 지역 곳곳에 활기찬 공공장소를 다양하게 만들어내고, 거기에서 심신의 환기가 일어나는 분위기나 프로그램이 제공되어야 한다.

폭염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대응해야 할 재난이다. 우리의 안락함은 지속가능한가. 인간의 존엄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취약한 삶을 서로 돌보는 가운데, 더위를 다스리는 공동체의 기술은 향상된다. 나무 그늘의 호젓함을 만끽하며 드넓은 바람을 호흡하는 가슴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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