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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의길 칼럼] 트럼프의 스무 걸음, 남·북·미의 ‘호시우보’

등록 2019-07-01 18:01수정 2019-07-01 19:25

북녘땅에서 트럼프의 스무 걸음은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단숨에 소화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남·북·미는 이제 호랑이 등에 탄 형국이다.

결과에 조급해 일희일비하지 말자. 하노이 회담과 판문점 3자 회담이 말해주는 교훈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0일 오후 판문점 남쪽 자유의 집에서 회동을 마친 뒤 함께 군사분계선으로 이동하고 있다. 판문점/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0일 오후 판문점 남쪽 자유의 집에서 회동을 마친 뒤 함께 군사분계선으로 이동하고 있다. 판문점/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트럼프는 스무 걸음으로 역사를 만들었다”고 <시엔엔>(CNN)은 보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0일 판문점의 군사분계선을 넘어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회동한 것을 두고 한 평가이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북녘땅에서 트럼프의 스무 걸음은 냉전이 와해되던 1970년대 이후 한반도 문제 해결의 핵심 통로로 여겨지던 남·북·미 3자 회담을, 그것도 정상 차원에서 단숨에 소화했다는 역사적 의미이다. 북한은 한반도 전쟁 상태를 해결할 주체는 자신과 미국이라며 양자 사이의 해결을 주장해왔다. 하지만, 분단과 전쟁의 당사자이자, 북한보다 국력에서 압도하는 한국을 빼고는 답이 있을 수 없다. 그 타협점이 70년대 후반부터 제기된 남·북·미 3자 회담이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1977년부터 3자 회담을 극비리에 추진했다. 그가 1979년 6월 한국을 방문할 때에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고위급 3자 회담을 구체적으로 준비했다. 하지만 남북 양쪽, 특히 북한의 거부로 무산됐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마지못해 응하는 시늉을 했으나, 김일성 당시 주석은 이를 미국의 꼼수로 봤다. ‘괴뢰정권’인 한국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미국·한국 대 북한이라는 2 대 1 구도로 북한을 압박하는 술수로 본 것이다. 미국이 추진한 3자 회담은 1983년 4월 호스니 무바라크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 다시 중재했으나 김 주석이 거부했다.

하지만 북한은 몇달 만에 혁명적 변신을 하며 3자 회담을 평화공세의 단골 의제로 삼았다. 한국을 빼고는 한반도 문제를 논의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에다, 3자 회담이 북한이 줄곧 열망하던 미국과의 대화가 가능한 유용한 창구임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해 10월8일 북한은 극비리에 중국을 통해 미국에 3자 회담을 전격 제의했다. 그런데 이튿날 미얀마를 방문해 아웅산 장군 묘소를 참배하던 전두환 당시 대통령 일행에게 북한이 보낸 특공대들의 폭탄 테러가 가해졌다. 3자 회담에 미온적이었던 한국 정부한테 회담 제의는 아웅산 테러를 호도하려는 음모일 뿐이었다.

미국은 테러 충격이 가시기를 기다려 그해 말부터 한국을 압박했다. 1985년 초 한국 언론을 통해 북한의 3자 회담 제의 및 한국 정부의 거부 사실이 누설됐다. 리처드 워커 주한미국대사가 회담 방해공작이라고 격분했으나, 결국 3자 회담은 물 건너갔다.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남북은 이를 계기로 접촉을 시작해, 1985년 중반 장세동-허담이 비밀특사로 남북을 오가며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 직전까지 교섭을 이어갔다.

남·북·미 3자 회담이 다시 부상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전격적으로 수락하며 3국의 정상외교가 본격화하기 시작한 2018년 초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해 3월21일 남북정상회담 준비회의에서 “진전 상황에 따라서는 남·북·미 3국 정상회담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며 “남북, 북-미 회담과 앞으로 이어질 회담들을 통해 우리는 한반도 핵과 평화 문제를 완전히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4월의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뒤 예정된 북-미 정상회담은 문 대통령도 참석하는 3국 정상회담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장밋빛 전망이 한때 나돌기도 했다. 그 이후 상황은 우리가 본 것처럼 녹록지 않았다. 그대로 가면, 최대의 패배자는 트럼프·김정은·문재인 3자가 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트럼프의 트위트 한방을 계기로 남·북·미가 40년 이상 씨름하던 3자 정상회담이라는 더 큰 판을 만들어냈다. 트럼프의 임기응변, 이에 호응하는 김정은의 결단, 판을 지키려는 문재인의 중재자 역할이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실질’보다는 ‘상징’뿐이라는 비판도 거세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 “독재자들에게 애면글면하고 김정은에게 아부했다”는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후보 진영의 논평은 유력 대선후보인 그가 트럼프 정상외교에 대한 미국 주류의 일반적 인식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가벼이 볼 수 없다. 하노이 정상회담이 좌초된 근본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나 가능했던 북-미 정상회담, 미국 대통령의 군사분계선 월경에다 남·북·미 정상회담까지 한꺼번에 질주하고 있다. 남·북·미는 이제 호랑이 등에 탄 형국이다. 결과에 조급해 일희일비하지 말자. 하노이 회담과 판문점 3자 회담이 말해주는 교훈이다. 호랑이의 눈을 가지고, 소처럼 걸어가는 ‘호시우보’만이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담보한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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