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 지난 6월19일 중앙노동위원회는 금속노조가 현대차 등 9개 원청 사업자를 대상으로 제기한 노동쟁의 조정 신청을 각하했다. 원청의 사용자성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과 국제노동기구(ILO)의 2006년 이후 반복된 권고에도 불구하고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원청 기업에 대한 교섭 요구는 이렇게 무산됐다. 입법예고된 산업안전보건법 시행령 개정안은 노동자들의 안전과 관련된 원청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도급 승인 대상을 확대하고 원청 책임과 특수고용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지 않는다면 문재인 정부는 노동자 고 김용균씨의 죽음을 언급할 자격이 없다. 지난해 11월에 우정사업본부와 우정노동조합 간 합의로 집배원 1천명의 증원이 추진됐다. 하지만 예산이 한푼도 배정되지 않았다. 올해 집배원 9명이 과로와 안전사고로 사망했다. 고속도로 요금 수납원들은 직접고용 대신 집단해고로 내몰리고 있다. 법원의 불법파견 판결도 소용이 없었다. 학교의 급식 조리원과 돌봄 선생님들은 차별과 저임금의 실태를 폭로하고 있다. 가장 모범적인 사용자여야 할 ‘노동 존중’ 정부조차 벼랑 끝에 선 약자들의 저항을 불편해한다. 촛불 앞에 스러진 과거 정부도 그랬다. 현대중공업의 대우조선 인수를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다. 아마도 현대중공업의 법인 분할이 손자회사인 조선소를 부실화하려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정부가 서두르는 사정에도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그래도 두가지 사실은 남는다. 첫째는 현대중공업 재벌로서는 인수 자금 부담을 최소화하며 일가의 지배력과 경영권 세습에 대한 위협 요소를 차단하게 되는 점이다. 둘째는 결국 위험은 구조조정 대상으로 내몰릴 노동자들과 하청업체들이 부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지난해 6월 최저임금법 개정으로 산입 범위가 확대된 이후 정부의 노동 정책은 한계를 노정해왔다. 구관이 과연 명관인지, 성장률과 일자리 수치를 단기적으로 높이려면 재벌 대기업의 협조만큼 확실한 처방도 없을 법하다. 경제 패러다임의 전환을 천명하면서 제시했던 성장의 구조적 제약 요인은 그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차별에 가슴이 응어리지고 고용 불안에 앞날을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필자는 이와 관련해 문재인 정부의 경제 정책인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정부 자신의 설명부터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좌파 정책이라는 색안경을 벗고 공정해지자면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노동 보호와 노동의 교섭력 강화를 중요한 과제로 사고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노동 문제는 경제 정책의 영역이 아니라는 시각이다. 그러나 이는 정책의 본래 근거인 포스트케인지언 임금주도성장 이론과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이 대안적인 성장 이론의 기본 관점은 노동 계층의 정치적 영향력과 사용자에 대한 협상력이 커지면서 소득분배의 불평등이 시정되고 유효 수요가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이 배제된 소득주도성장은 자기모순이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성장은 그 동력과 지지 기반을 조직 노동과 경제적 약자의 연대에서 찾고자 한 것이었다. 현장 노동조합의 힘을 키우는 법제도의 개선이야말로 소득주도성장을 위한 기본 정책이 되었어야 하는 이유다. 비록 그것이 성장률이나 일자리 수치를 직접적으로 올릴 수는 없더라도 말이다. 국제노동조합총연맹(ITUC)은 올해까지 6년 연속 한국을 노동권리지수 5등급 국가로 분류했다. 이는 내전 등으로 법치가 붕괴된 상황이 아니고서는 최하위 등급이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은 이제 노동 존중이라는 허구적인 담론과 함께 껍데기만 남는 것인지 우려스럽다. 외주화와 유연화의 흐름 속에 초단시간 노동과 플랫폼 노동이 확산되면서 노동 기본권의 정의와 사용자의 범위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요청되는 오늘, 정부가 노동을 배제하는 현실은 차라리 비극이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죽을 수 없다는 오늘 노동자들의 선언은 노동이 배제된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실패를 예언하고 있다. 더 늦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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