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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미 육군에 증강된 한국인 / 전범선

등록 2019-07-05 17:40수정 2019-07-06 15:05

전범선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트럼프가 김정은을 만났다. 문재인이 중재했다.’ 사실상 종전선언과 같은 역사적 순간이었다. 나는 뿌듯하고 희망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왜 한반도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대한민국 대통령이 미합중국 대통령을 모시고 판문점에 가야 할까. 그리고 뒤에 빠져 지켜봐야만 할까. 한국전쟁이 사실은 미-북 전쟁이기 때문이다. 나의 군 생활이 떠올랐다.

나는 카투사였다. 카투사란 “미 육군에 증강된 한국인”을 뜻한다. 일반 육군보다 훨씬 편하다. 그래서 지원했고, 실제로 그랬다. 지금도 군대 얘기만 나오면 나는 “카송합니다”를 반복한다. “카투사라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카투사도 스트레스가 없진 않았다. 미국군과 한국군 사이의 불평등한 구조가 가장 컸다.

시기가 절묘했다. 나는 2016년 12월19일 입대했다. 바로 한달 전, 나와 양반들은 광화문 민중총궐기 무대에 올랐었다. 처음으로 100만명이 운집한 날이었다. 나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연주했고 사람들은 “박근혜 하야”를 외쳤다. 무대 뒤에는 백기완 선생님도 계셨다. 이 땅의 오랜 민주화운동의 연장전이었다.

국정농단의 비민주성은 극명했다.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는데 최순실이 권력을 행사했다. 이를 규탄하는 촛불시위의 민주성도 분명했다. 박근혜가 비로소 탄핵될 때, 대한민국의 주권자는 최순실이 아닌 오천만 국민임이 입증되리라. 훈련소 가는 길, 나는 곧 통수권자가 바뀔 거라 믿으며 안도했다.

논산에서의 5주는 무난했다. 그러나 의정부 캠프 잭슨에 들어가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미군 교관들은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미군의 훈련 방식이라고 이해했다. “그 머저리 같은 한국 군복과 장비는 갖다 버려”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좀 너무한다 생각했다. 그래도 카투사 떨어진 친구들한테 미안해서 참았다. 그때, 도널드 트럼프가 제45대 미합중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유냉스트 중사는 거센 남부 억양으로 외쳤다. “오바마가 다 말아먹었지만, 트럼프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거야!” 그는 벽에 걸린 오바마 초상화를 액자에서 꺼낸 후 찢어버렸다. ‘스시컷’(양옆을 삭발하고 위에만 짧게 남긴 초밥 모양의 머리)을 한 100여명의 카투사들은 숨을 죽이고 쳐다봤다.

이제 누가 나의 보스인지 분명했다. 나는 미군복을 입고 있었고, 나의 어깨에는 아무런 국기도 없었다. 식당에 쓰여 있는 지휘계통도에는 최순실도, 박근혜도, 문재인도 없었다. 빨간 넥타이를 맨 트럼프가 나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거기 있기까지 대한민국 국민 전범선의 주권은 전혀 개입하지 못했다. 나와 내 최고 지휘관은 철저히 봉건적인 주종관계였다. 그는 내게 아무런 민주주의적 책임이 없었다. 고작 두달 전 광화문의 기억이 신기루처럼 아득했다.

카투사가 존재하는 한 대한민국은 온전한 주권국가가 아니다. 카투사는 전쟁 중 존 무초 대사의 요청에 따라 이승만이 구두 합의한 임시 제도였다. 지금도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다. 카투사의 업무는 한·미 양쪽 어학병이 충분히 대신할 수 있다. 미군이 주둔하는 일본, 독일, 영국 등 다른 어느 나라에도 카투사 같은 제도는 없다. 그럼에도 존속되는 것은 징집제가 있는 한 카투사 가는 것이 명백한 이득이기 때문이다. 못 간 사람은 부럽고, 갔다 온 사람은 부끄럽다. 나만 해도 이미 혜택을 본 처지에서 카투사 제도를 비판하기 조심스럽다.

한-미 관계가 형식적으로나마 평등해지는 날을 꿈꾼다. 아마 한반도 평화체제의 꿈과 하나일 것이다. 미 육군에 “증강된” 한국인은 더 이상 대한민국의 당당한 민주시민과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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