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평가 아홉까지 했으니 열은 채워야지? 말처럼 쉽지가 않다. 류현진 투수는 10승 문턱에서 연신 고배를 마시다, 전반기 마지막 기회에 겨우 승리를 거두었다. 바둑은 아무리 고수라도 9단이 최고의 자리, 신의 세계에 들어서지 않는 한 10단은 불가능하다. 10의 완성은 그처럼 어렵다. 내게도 이와 닮은 미완의 번뇌가 있다. 물론 이들 옆에 갖다붙이기엔 아주 시시한 일이다. 얼마 전 서랍을 뒤지다 명함 크기의 종이 한장을 찾았다. 어라, 이걸 여기 놔뒀나? 나는 곧바로 종이 위에 찍힌 도장의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모두 아홉개가 찍혀 있었다. 좋아하는 카페의 쿠폰인데, 자주 갈 수 없는 곳이라 두세달에 한칸씩 채웠다. 지난 이사 때 잘 챙겨둔다는 게, 나도 모를 곳에 꼭꼭 숨겨둔 꼴이 되었다. 나는 지갑에서 새 쿠폰을 찾아 도장 몇개를 확인했다. 이제 둘을 합치면 공짜로 커피가 솟아나는 기적을 완성할 수 있다. “죄송하지만 이제 쿠폰은 테이크아웃만 됩니다. 그리고 6월말까지 쓰셔야 해요.” 직원은 친절하게, 그러나 당황스러운 말을 했다. 나는 다음 약속 전에 한시간 정도 카페에 있을 예정이었다. 여기 커피를 들고 다른 가게로 갈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이 안에서 마시기로 하고, 커피를 산 뒤 도장을 하나 더 찍었다. 카페의 에스엔에스(SNS)에는 쿠폰을 없애는 이유가 적혀 있었다. 말로 다 하지 못할 ‘쿠폰 악용 사례’ 때문이라고 했다. 과연 어떤 악용 사례가 있었을까? 도장이 마르기 전에 입김을 불어 다른 쿠폰에 찍었나? 도장을 스캔받아 인쇄하거나, 가짜 도장을 만들어 빈 쿠폰에 찍었나?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정황은 짐작되었다. 종이 쿠폰의 시대는 확실히 저물고 있다. 단지 그 카페만의 변화는 아니다. 많은 곳에서 스마트폰 앱이나 휴대전화번호 입력을 이용한 적립 시스템으로 바꾸고 있다. 하지만 그런 기술적인 변화는 겉모습일 뿐이다. 아날로그의 종이 쿠폰과 도장으로 상징되는, 가게와 손님의 전통적인 약속 관계가 버텨낼 힘을 잃고 있다. 내게는 스탬프 쿠폰만 모아둔 지갑이 있다. 카페, 빵집, 식당을 처음 방문하면, 주인은 반갑게 도장 하나를 찍어 준다. 그 가게가 마음에 들면 나는 다시 찾아가 도장을 받는다. 그렇게 몇 칸이 차면, 마저 채우고 싶어서라도 다시 방문한다. 그런 의도로 내 지갑에 꽂아둔 쿠폰이 칠십장을 넘는다. 하지만 그중 한번이라도 쿠폰을 채워본 가게는 여덟 군데밖에 안 된다. 내가 충성도가 너무 낮은 고객이어서일까? 지난번 이사 때, 나는 갖고 있는 쿠폰의 80%를 버렸다. 쿠폰을 좀 채웠다 싶으면 집을 옮겨야 하니, 몇년 주기로 이 게임은 초기화된다. 요즘은 더 큰 어려움이 생겼다. 내 쿠폰에 도장을 찍어주던 가게 자체가 갑자기 사라지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희망 가득한 손길로 예쁜 쿠폰에 도장을 찍어주던 주인이 몇달이 안 되어 힘없이 사과문을 붙인다. ‘쿠폰은 월말까지만 사용 가능합니다.’ 거주자도 가게도 오래 머무르지 못하니, 열칸을 채울 만큼의 단골 관계도 어려워진다. 고작 커피 한잔이다. 그런데 몇주, 몇달, 혹은 1년 이상 애를 쓰며 칸을 채우는 이유는 뭘까? 우리 인생에는 눈에 보이는 완성을 이룰 기회가 흔하지 않다. 시험도 일도 끝날 줄을 모르고, 결과는 손에 잡히지 않는다.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내가 만지는 서류, 조립한 부품이 무엇을 만드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점심 뒤에 마시는 커피로 도장 열개를 모으면 새로 한잔이 생긴다. 열칸이 꽉 찬 쿠폰을 손에 쥔 충족감! 그 기분을 계속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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