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특파원 미국을 왜 ‘멜팅 폿’(인종의 용광로)이나 ‘이민자의 나라’라고 부르는지에 긴 설명이 필요 없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때문에 하고 넘어가야겠다. 미국에 오고 몇달 뒤인 지난해 12월, 딸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인터내셔널 데이’ 행사가 열렸다. 재학생과 가족들이 출신 국가의 음식과 문화를 소개하고 공유하는 자리였다. 가보니 한국·중국·일본을 비롯해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멕시코 등 비교적 자주 접해본 나라는 물론이고 그리스, 터키, 우크라이나, 에스토니아, 모로코, 이집트, 에티오피아 등 한국에서는 만나보기 힘든 다양한 나라 출신들이 각각의 부스를 차려놓고 있었다. 전세계 여러 직종의 사람들이 몰려 있는 워싱턴 권역이라는 특성상 더욱 그랬겠지만, 난생처음 보는 음식들을 맛보며 미국은 정말 다양성의 나라라고 절감했다. 미국의 가장 최근 인구조사인 2010년 자료를 보면, 백인이 미국 인구의 72.4%를 차지하고, 중남미 출신 히스패닉(16.3%), 흑인(12.6%), 아시안(4.8%), 미 원주민(0.9%) 등 비백인이 37.6%다. 출신국 혈통으로 따지면 독일(14.7%), 아프리카(12.3%), 멕시코(10.9%), 아일랜드(10.6%), 영국(7.8%), 이탈리아(5.5%), 프랑스(3.1%), 폴란드(2.8%), 스코틀랜드(1.7%), 푸에르토리코(1.6%) 등의 차례다. 전세계 거의 모든 땅의 후손들이 인구 3억3천만명의 미국을 이루고 있다. 민주당의 비백인 여성 하원의원 4명에게 “왔던 나라로 돌아가라”고 한 트럼프의 발언을 놓고 벌어진 풍경 자체도, 미국에서 출신국을 따지는 게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위험한지 잘 보여준다. 트럼프가 겨냥한 의원들은 푸에르토리코(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소말리아(일한 오마), 팔레스타인(러시다 털리브), 아프리카(아이아나 프레슬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원에서 트럼프 규탄 결의안을 주도한 톰 맬리나우스키 민주당 의원은 폴란드 태생이다. 트럼프를 옹호한 공화당의 미치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는 “대만에서 태어난 당신 부인 일레인 차오(미 국토부 장관)에게 누군가 ‘당신 나라로 돌아가라’고 하면 인종주의로 여기겠느냐”는 질문에 즉답을 피했다. 켈리앤 콘웨이 백악관 선임고문은 한 기자에게 “내 선조는 아일랜드와 이탈리아계다. 당신은 어느 민족이냐”고 되물었다. 이 모든 논란을 촉발한 트럼프는 독일계 이민 3세이고, 그의 부인 멜라니아는 슬로베니아 출신으로 부모들까지 연쇄이민으로 미국에 들어왔다. 트럼프는 “나는 인종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지만 그의 전력이 대신 말해준다. 그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아프리카·남미 국가를 “거지 소굴”이라고 일컬었다. 또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려 했으며, 백인우월주의자의 차량에 한 여성이 숨졌을 때 “양쪽 모두에 좋은 사람들이 있다”고 두둔했다. 트럼프의 발언들은 배제와 폭력의 기운을 북돋운다. 그가 노스캐롤라이나주 유세에서 오카시오코르테스 등 의원 4인방의 이름을 댈 때 관중은 “돌려보내라”며 환호했다. 트럼프가 통합과 관용이 아닌 분열과 혐오를 무기 삼아 대선 앞으로 지지층을 묶어가는 사이, 미국 사회는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한 교민은 “갈수록 ‘네가 왜 여기 있냐’는 백인들의 눈빛을 느낀다”고 말했다. 2016년의 멕시코 국경장벽 공약이 2020년에는 ‘네 나라로 돌아가라(Go back)’는 구호로 업그레이드될지도 모른다. jay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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