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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고객은 누구인가 / 김찬호

등록 2019-07-19 18:05수정 2019-07-19 19:04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예전에 노트북 수리를 받으러 어느 서비스센터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담당 직원은 정성스럽게 기계를 살펴보면서 고장 난 부분을 꼼꼼하게 고쳐주었다. 모두 마무리되어 노트북을 챙겨서 나오는데, 그 직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까지 따라와서 깍듯하게 배웅했다. 웬 과잉 친절?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인사 끝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곧 고객 만족도를 확인하는 전화가 갈 텐데 최고 점수를 달라는 부탁이었다.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어 모든 영역에 공급 과잉이 일어나면서 소비자의 마음을 붙잡으려는 노력이 치열하다. 그런 가운데 감정노동이 가혹해진다. 고객은 무조건 옳다, 그러니 어떤 불평에도 고개 숙여 정중히 사죄하라는 업무 지침이 내려온다. 더 나아가 만족도를 높이고자 제품이나 서비스 구매 이후에 설문조사가 이뤄진다. 점수가 낮은 직원은 지적을 받고 관리의 대상이 된다. 한 문항이라도 최고 점수를 받지 못하면 0점 몇점 차이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고, 만일 앙심을 품은 고객이 최저 점수를 준다면 심각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고객의 힘은 그토록 막강하다.

얼마 전에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귀갓길에 본사로부터 만족도 조사 전화를 받았다. 서비스의 질과 직원의 태도 등에 대한 질문에 이어서, 그 출장소(지점)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요청했다. 나는 대체로 만족한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해보니, 문제가 있는 직원 한 명이 떠올랐다. 30살 전후의 남자 직원인데, 웃는 얼굴로 고객을 대하는 것을 한 번도 못 보았다. 약간 화가 난 것처럼 보였고, 상대방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뒤늦게라도 ‘신고’를 해야겠다 싶어 방금 걸려왔던 번호로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그 번호는 발신만 가능하고 수신은 안 된다는 안내가 나왔다.

그 후 며칠 동안 나의 느낌과 판단을 곰곰이 되돌아보았다. 그 청년의 마음과 삶에 대해 여러 가지 상상을 했다. 그는 어린 시절 가정이나 학교에서 괴로운 일들을 경험했을지 모른다. 또는 지금 직장에서 상사로부터 갑질에 시달리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의 굳은 얼굴과 무뚝뚝한 말투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태도는 본인의 사회생활을 위해서라도 개선해야 할 점이지만 고객이 불만사항으로 제기할 문제는 아니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그날 통화가 안 되길 천만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경솔한 한마디가 그 직원에 대한 중대한 처분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제품에 대한 불만은 대개 객관적이고 시스템의 개선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그에 비해 서비스에 대한 문제 제기는 매우 주관적이고, 구체적인 직원의 인격을 평가하면서 모멸감을 줄 수 있다. 고객 감동 경영의 일환으로 실시되는 만족도 조사는 직원들에게 무서운 검으로 작용한다. 소비자의 평가가 그렇게 절대시되어야 될까. 아주 근소한 점수 차로 직원들의 등급을 매기고 그래서 담당자들이 고객에게 만점을 달라고 당부하도록 만드는 관료주의적인 평가 시스템은 재고되어야 마땅하다. 더구나 그것은 고객의 입장에서 감동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성가신 일로 여겨질 때가 많다는 점도 짚어두고 싶다.

고객은 왕이 아니다. 말 그대로 ‘객’(客)이다. 손님이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하면 난감해진다. 사소한 결함을 지적하고 불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작은 호의에 감사를 표하는 것이 손님의 도리다. 과분한 대접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황송한 선물이다. 많은 감정노동자들이 고통을 받는 시대에, 소비자에게 요구되는 미덕은 손님의 겸손함이다. 서로를 존중하고 환대하는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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