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저자 ‘정치적으로 우울하다’는 말이 가능할까? 사회학자 김홍중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스스로를 주권자로 인지하는 주체가 “자신의 주권이 부서지고 훼손되는” 경험에서 느끼는 마음을 ‘주권적 우울’이라고 명명한다. 세월호 참사에서 우리가 겪은 집단적 슬픔과 좌절이 그 예다. 이 우울감은 어린 학생들을 포함한 수백명의 생명이 상실되었다는 사실뿐 아니라, 배의 침몰과 구조작업, 애도의 과정 전반에 우리가 주권자로서 운영하는 국가가 그토록 무력하다는 현실에서 비롯된다.(물론 오래가지는 않았고, 곧 누군가는 폭식을 시작했다.) 헌법 전문은 주권자로서의 ‘우리 대한국민’이 일제에 항거한 3·1운동의 법통을 잇고 있으며, 4·19혁명의 항거 정신을 계승한다고 밝힌다. 이 정신은 80년 광주, 87년 6월항쟁 등을 거치며 확장되고 강화되었다. ‘대한국민’의 주권은 특정한 민족, 지역, 정치세력이라는 낙인과 배제, 억압에 따른 우울에 맞서며 실현되어온 셈이다.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주권자라고 확고하게 믿으며 그렇기에 정치 때문에 자주 분노하고 좌절한다. 국제사회는 한국을 대만, 홍콩과 함께 동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적인 민주주의적 공동체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80년대 대학에 입학한 현재의 86세대들은 아마도 지금을 사는 모든 세대 가운데 이 주권적 우울을 가장 깊이 경험한 세대일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공동체의 주권자임을 높은 수준으로 각성한 (거의) 최초의 세대였으나 동시에 그들이 입학해서 직면한 현실은 80년 5월의 광주였다. 86세대들은 몸을 던져 이 ‘주권적 우울’감과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저항의 에너지를 사회 전체로 전파하는 데 앞장섰고 마침내 87년의 6월이 가능했다. 현 집권세력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국정농단에 맞서 수백만의 시민들이 거리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시킨 힘도 이 ‘우울한 마음’이 일으킨 힘이었을 것이다. 물론 박 전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며 태극기를 들고 트럼프를 지지했다가 이제는 아베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자신이 생각하는 주권침해에 대항하는 중이다. 그러나 이들의 기본 정서는 우울(무기력)이 아니라 불안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정치적 이유에서 우울한 사람들은 정치권력을 지닌 기득권으로부터 권력을 다시 배분하기 위해 저항하지만, 정치적 이유에서 불안한 사람들은 불안을 야기하는 세력을 제거하려 애쓴다. 빨갱이, 동성애자, 경제적 기여가 없(다고 믿)는 이주민 색출이 가장 중요한 주권자로서의 관심이다. 우울한 사람들은 연대하고 도움을 얻기 위해 타자를 찾지만 불안한 사람들은 제거하기 위해 타자를 찾는다. 문재인 정부는 다수의 ‘우울한’ 주권자들이 축적한 에너지와 연대로 탄생했다. 지금 문재인 정부의 주축을 이루는 행위자들은 이 주권적 우울을 가장 깊이, 오랜 기간 경험한 세대들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우울한 세대’와 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우울이 아닌 불안에 지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토착왜구”와 친일파, 적폐들을 찾아내려는 목소리가 사방을 울린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정치공동체로서의 우리를 하나로 묶고 성숙시킨 마음의 상태는 불안이 아니라 우울이었다. 우울한 주권자들은 타자를 배제하기보다 연대를 구하므로 타자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낙인찍기보다 한 사람이라도 설득하려 애쓴다. 한반도를 넘어 아베의 비합리적이고 무례한 정치적 행보에 무기력을 느끼는 우울한 주권자들이 일본열도에도 살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 ‘우울한 사람들의 연대’에 의해 탄생한 정부라면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부당한 일본 정부의 조치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 현명하게 대응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은 정부를 믿고 지지해주십시오. 그러나 이것이 일본 국적을 가진 시민들, 일본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지닌 시민들에 대한 혐오로 이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불안이 아니라 우울의 연대로 이 위기에 대응하기를 희망한다.
이슈강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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