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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주진형 칼럼] 저성장 시대, 역삼각형 인력구조의 딜레마

등록 2019-07-23 17:59수정 2019-07-26 16:57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대표이사

지난 5월 칼럼 ‘멘토는 없다’에서 나는 한국이 물적 자원이 아니라 인적 자원이 부족한 나라라고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거꾸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슨 이유에서 이렇게 일반적인 인식에 반대되는 얘기를 했는지 좀 더 설명하고 싶다.

제한된 지면에서 자세한 통계 분석을 통해 체계적으로 내 주장을 논증할 수는 없다. 그러나 큰 그림에서 이것 하나는 지적하자.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지금까지 20년간 한해도 거르지 않고 경상수지가 흑자였다. 최근 5년 동안엔 국내총생산(GDP) 대비 평균 6%의 흑자를 내고 있다. 이에 반해 외환위기 전에는 80년대 일시적 호황일 때를 제외하곤 늘 경상수지가 적자였다.

경상수지 적자는 언제 생기는가? 국내소득보다 국내지출이 클 때 생긴다. 국내저축보다 투자가 많을 때 생긴다. 외환위기 발생 전에는 국내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원보다 더 많은 돈을 투자에 쓰느라 경상수지가 적자였다. 외환위기를 겪고 나서 한국이 한번도 경상수지가 적자였던 적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투자를 하는 데 국내자본이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현장에서 관찰한 것도 그러하다. 기업이 투자할 때 자금 조달은 별로 문제가 안 된다. 그보단 제대로 훈련된 인력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나마 있는 인력도 제대로 못 쓰고 있다.

90년대 중반에 한국에 돌아온 후 몇년 동안 나는 한국의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나보다 10년 위인 상사들보다 내 또래 직장인들이 확실히 더 우수했고, 나보다 10년 아래인 후배들이 우리 세대들보다 더 우수했다. 그들은 더 많이 알고, 더 개방적이고, 더 유연했다. 세월이 지나면 이들이 지도층이 될 것이고 또 그들보다 아래 세대가 그들의 뒤를 이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만으로도 경제는 성장하고 사회도 저절로 더 나아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실제는 이런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고속성장기가 저속성장기로 너무 빨리 전환되면서 생각하지도 않은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병목 현상이다. 연령 구조가 역삼각형인 회사가 많아지고 있다. 직장 퇴직연령이 늦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년 전만 해도 대기업에는 50살이 넘은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요즘은 흔하다. 이들은 80~90년대 기업들이 빠른 속도로 팽창할 때 대량으로 입사한 사람들이다. 이에 반해 저성장이 예상보다 빨리 닥치면서 젊은 세대가 취직할 일자리 수는 빠르게 줄었다. 한편에선 노화된 인력이 직장을 붙잡고 있고 다른 한쪽에선 젊은 인력이 시작도 못하고 있다.

지금 높은 직급에 있거나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발전 단계 초기에 큰 사람들이다. 물론 그들은 전체적으로는 동년배들 사이에서는 우수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대 사람들 사이에서 비교할 때 얘기일 뿐 세대 간 비교를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후배들 능력이 일반적으로 더 뛰어나다. 어릴 때부터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랐고, 더 좋은 교육을 받았고, 사회 경험에서도 상대적으로 더 좋은 훈련을 더 일찍 받았다.

이들 장년층 인력이 상대적으로 퇴화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첫째, 고속성장기에는 기술과 지식이 빨리 변한다. 그 결과 역설적으로 이들 장년층 인력은 고속성장 때문에 더 빨리 퇴화했다. 70~80년대 학교 다닐 때 배운 것은 원래도 부실했지만 고속성장 덕분에 더 빠르게 쓸모없게 되었다. 둘째, 재교육 과정이 부실했다. 하급 직원용 교육은 있지만 고급 지식노동자로서 필요한 지식이나 리더십 교육은 워낙 부실하다. 셋째, 이들 세대 중 많은 사람은 중간 간부만 되어도 직접 업무를 하지 않고 아랫사람에게 시키는 방식으로 일했다. 데이터도 직접 다루지 않고 보고서도 직접 쓰지 않았다. 지식노동자로선 치명적이다.

지금은 능력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자기들보다 더 좋은 훈련을 받은 후배들을 지휘하는 시대가 됐다. 이 모든 것은 만약 나이가 든 사람이 자기의 생산성에 비례한 보상을 받는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은 나이 든 층이 너무 많은 권력과 보상을 누리도록 설계된 체제다. 권력구조가 위계적일 뿐만 아니라 동일 직장 내 청년층 대비 장년층 사람들의 임금 비율이 지나치게 높다.

한국은 과거엔 별로 고민할 필요가 없던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구체제의 비합리성이 급격히 들이닥친 저성장 국면과 맞물리면서 한국 사회에 전혀 새로운 도전 과제를 던지고 있다. 50대가 조기은퇴 하라는 말이 아니다. 조금 덜 누리고 후배도 좀 더 생각하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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