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 2부 ‘삶에 대한 역사의 이로움과 해로움’에서 역사를 읽는 세 가지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번째가 ‘기념비적 방식’이다. 기념비적 방식은 역사 속의 위대한 사건, 위대한 인물을 본받고자 하는 역사 읽기 방식이다. 위대한 사건과 인물은 모범으로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영감과 자극을 준다. 협상의 기술로 거란을 물리친 ‘서희’나 해전사의 금자탑을 세운 ‘이순신’을 호출하는 것이 이런 역사 읽기의 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니체가 두번째로 거론하는 것은 ‘골동품적 방식’이다. 이 방식으로 역사와 만나는 사람은 과거가 물려준 모든 것을 골동품을 대하듯 소중히 여긴다. 나무의 뿌리가 토양을 어루만지듯이 역사와 문화를 아끼고 돌본다. 선조가 살아왔고 자기가 살고 있으며 후손이 살아야 할 곳이므로 이 땅의 역사를 가슴에 품어야 할 것으로 느끼는 것이다. 세번째는 ‘비판적 방식’이다. 이 방식으로 역사를 읽는 사람에게 역사는 위대한 것만도 사랑스러운 것만도 아니다. 역사는 비판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불만족스럽고 견딜 수 없는 현재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과거이기 때문에 역사는 기소돼야 하고 탄핵당해야 한다. 그 비판과 부정 속에서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있다. 일제에 나라를 넘긴 친일파의 행적이 바로 그런 비판적 역사 읽기의 대상이 될 것이다.
니체가 그 역사론에서 강조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역사가 단순한 지식이나 교양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역사는 우리 삶에 봉사해야 한다. 그래서 니체는 글의 서두에 괴테의 말을 인용한다. “내 활동을 키워주거나 내 삶에 활기를 불어넣지도 않으면서 무작정 가르치려고만 드는 모든 것을 나는 혐오한다.” 삶의 활력을 키워주지 않는 역사 지식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마찬가지로 니체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앎의 유희로 끝나는 역사 읽기도 거부한다. “지식의 정원에서 한가하게 놀고 있는 버릇없는 게으름뱅이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역사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런 역사가 아닐까. 일본의 무모한 ‘역사-경제 도발’에 맞서 우리의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 유용한 역사, 우리를 짓누르려 하는 힘들에 맞서 투쟁하는 데 쓸모있는 역사를 공부할 때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